낮과 밤 시간
8시 30분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신학교에는 학년별로 강의실이 하나씩 있었다.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교수님들이 차례로 들어와 수업을 하고 나갔다. 철학과 신학은 대개 학교에 상주하는 교수 신부님들이 가르쳤다. 교양 과목은 외부에서 온 신부님이나 일반 교수님이 가르쳤다.
일반 대학에서 출석을 부르고 수업을 시작한다면 신학교에서는 기도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참고로 신학교에서는 출석을 부르지 않았다. 학생이 수업에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수업시간에 강의실 말고 갈 만한 곳이 신학교에는 없었다. 자기 방 옷장 안에 숨어 있으면 모를까. 수업시간에 딴짓하는 학생도 없었다.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으로야 당구를 치든 바둑을 두든 상관없었지만 겉으로는 열심히 공부하는 척했다.
전원 출석에 범생이들처럼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시간은 12시 30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밥을 다 먹었다고 식탁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1시까지 식탁에 앉아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어야 했다.
1시가 되면 식사 후 기도를 하고 한꺼번에 식당에서 나갔다. 그때부터 3시까지 운동장에 나갈 수 있었다. 농구나 족구, 달리기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고학년생들은 신부님들과 우아하게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구관 3층에 있는 실내체육관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학생도 있었다. 한쪽 구석에 있는 피아노도 ‘띵까거릴’ 수 있었다. 기타 같은 개인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2층 공동 휴게실에서는 장기나 바둑도 두었다. 하루 가운데 유일하게 신학교가 조금 소란스러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연학실은 텅텅 비었다. ‘학습 금지 시간’이었다. 공부를 금지하는 시간이 있는 교육기관은 아마 신학교가 유일하지 않을까? 나야 아주 마음에 쏙 드는 시간이었다.
종소리 같은 것이 울리지 않아도 3시가 되면 한 명 두 명 운동장에서 사라졌다. 실내체육관에서 떠들던 소리도 사라졌다.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때부터 저녁기도가 시작되는 5시 30분까지는 이른바 ‘학습시간’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공동 침실을 쓰는 저학년들은 연학실에서, 독방을 쓰는 고학년들은 자기 방에서 면학에 힘써야 했다.
공부 말고 딱히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신학교에서는 개인 공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정해놓은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 시간이 부족했다(밤에 잠 안 자고 공부하는 것, 당연히 금지 사항이었다). 자연히 신학교 전체가 다시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건물 밖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주 가끔 길을 잘못 든 사람이나 교수 신부님을 찾아온 손님들이 보일 뿐이었다.
어느 날 오후였다. 연학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복도 계단 쪽에서 조그맣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시간에 그곳에서 웅성거릴 사람은 신학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궁금한 생각이 들었던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출입문 쪽을 쳐다보았다. 출입문을 열고 나가면 곧바로 계단이었다. 연학실 안에는 숨소리와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났다.
그때였다. 출입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한 뼘쯤 열린 출입문 사이로 낯선 남자의 눈동자 두 개가 보였다. 그 사람 눈에는 자신을 째려보는 100개쯤 되는 눈동자가 보였을 것이다. 얼마나 놀랐을까? 남자는 당황해하더니 얼른 문을 닫았다. 신학생도, 교수 신부님도, 교학과 직원도 아니었다. 학년장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공부에 집중했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연유로 기숙사까지 들어와서는 연학실 문을 열기까지 했는지 알만했다. 내가 그럴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였다.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에 안 가고 성당 마당에서 빈둥거리자 본당 신부님이 신학교로 심부름을 보냈다. 시외버스를 타고 2시간이 걸려 도착한 대구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 신학교에 도착했다.
비탈진 길을 올라가자 왼쪽으로 운동장이 보이고 신학교 건물이 나타났다. 운동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운동장뿐 아니라 그 어디에도 사람이 없었다. 여기가 대학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때만 해도 신학교에 대해 들은 바가 전혀 없었으니까.
대충 중앙 현관으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층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아무나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복도 끝으로 갔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투명 유리문이라 안이 보였다. 식당이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 식당 옆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10명이 손을 잡고 나란히 올라가도 될 정도로 넓었다. 올라 가볼까 하다가 말았다. 너무 조용한 데다 조금 어두컴컴한 것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올라가 보려고 했다. 도대체 1층에는 사람이 안 보였으니까.
그때였다. 중앙 현관 쪽에 사람이 나타났다.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그 귀신, 아니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난 2층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2층에 올라가면 정면에 세면장이 있고, 오른쪽은 침실로 이어지는 복도가, 왼쪽에는 연학실이 있었다. 아마 연학실 안에서 사람들 숨넘어가는 소리와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문을 살짝 열어보았을 것이다. 그 남자처럼.
5시 30분.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음악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저녁기도 시간임을 알리는 소리였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한 한 명도 빠짐없이 성당에 모였다. 자리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자리가 비면 누가 빠졌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녁기도는 6시에 끝났다. 아침과 똑같이 7학년 선배들부터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는 6시 30분에 끝났다. 그때부터 이른바 자유시간이었다. 뭘 해도 상관없었다. 대개의 신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책을 했다. 수십 개의 삼삼오오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깔깔거렸다. 거의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산책을 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같은 시간에 식사를 마친 교수 신부님들도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10명쯤 되는 신부님들은 옆으로 나란히 서서 기숙사 앞 도로를 따라 길게 왔다 갔다 했다. 그 길과 운동장은 단차가 심했다. 운동장에서 산책하는 신학생들이 마음껏 신부님들을 욕해도 들리지 않을 단차와 거리였다. 교수 신부님들은 신학생들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신학교 출신이었으니까. 그러므로 절대 운동장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은 그 시간에 실내체육관에서 기타를 치거나 피아노를 쳤다. 돌연변이 같은 극소수의 학생들은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평일 유일하게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과 달리 채널이 3개밖에 없던 시절이라 여기저기 돌려봤자 어린이 프로그램만 했다. 그래도 깔깔거리며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토요일 저녁에는 끝기도 후부터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다).
돌발퀴즈. 이 시간에 연학실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얼마쯤 될까?
정답은 빵 명.
운동장을 돌면서 산책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묵주기도를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의 일과였다. 삼삼오로 무리를 지어 산책하던 사람들끼리 계응으로 주고받으며 소리 내어 기도 했다. 그러다가 7시 50분이 되면 자동으로 성당으로 향했다. 끝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끝기도는 8시 10분에 끝났다. 끝기도와 함께 대침묵이 시작되었다. 규정상 숨이 넘어가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전 기도가 끝날 때까지. 규정상 건물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학교 건물을 관리하는 아저씨가 몇 군데 출입문을 바깥에서 쇠사슬로 친친 감아 잠근다는 소문이 있었다. 끝기도가 끝나고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진짜 그렇게 잠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끝기도 후 신학교는 완벽한 침묵 속에서 완벽한 감금이 시작되는 셈이었다.
공동생활을 하는 저학년들은 연학실에 모였다. 독방을 사용하는 고학년들은 각자 자기 방으로 갔다. 그때부터 할 일은 공부밖에 없었다. 10시 45분 취침 음악이 울릴 때까지. 대침묵 시간이었기에 공부하기 딱 좋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 실제로 모두 공부를 했다. 11시 취침 음악이 울리고 나면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곳이 신학교였다. 불을 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학교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