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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제수업 05화

신학교의 하루1

일어나서 아침 청소까지

by 우연의 음악

대구 신학교는 건물 두 동과 운동장 하나가 전부였다. 비탈진 산자락이라 기숙사 현관에 서면 멀리 대구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기숙사 옥상에 올라가면 바로 뒤가 앞산 순환도로였다. 두 건물은 2층에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운동장에서 봤을 때 왼쪽 건물을 구관이라 했고, 오른쪽 건물을 신관이라 했다. 학교처럼 긴 모양을 한 구관 은 지은 지 오래된 4층짜리 건물로 붉은빛을 띠었다. 신관은 최근에 지은 건물로 흰색의 정사각형 모양이었다. 높이도 7층이나 되었다. 특이하게도 사각형 기둥처럼 생긴 건물은 안쪽이 비어 있었다. 지하에 도서관이 있었고, 1층에는 교수 신부님들의 방이 있었다. 2층부터 신학생들의 기숙사였다.


구관 1층에는 강의실과 식당, 교학과가 있었고, 2층에 2학년 기숙사와 강당이 있었다. 3층에는 3학년 기숙사와 성당, 4층은 1학년 기숙사가 있었다. 4학년부터는 신관에서 생활했다. 4학년은 2인 1실, 5학년부터는 독방이었다. 참고로 신학교는 7학년까지 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공동 침실을 사용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양쪽으로 침대가 세 개씩 놓여 있었다. 침대마다 작은 책장과 옷장이 딸려 있었다. 한 방에 6명이 사는 셈이었다. 침실은 잠자고 옷 갈아입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었다. 학교에서도 가능하면 취침시간 외에는 침실에 들어가지 않기를 권장했다. 물론 이 권장 사항을 무시하고 한낮에 침실에 들어가 벌러덩 눕곤 하는 신학생들이 있었다. 내가 참 많이 그랬다.




KakaoTalk_20220411_114021789.jpg 6명이 같이 생활했던 1학년 공동 침실에는 침대를 중심으로 옷장과 책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규칙상 잠자는 시간 말고는 침대에 눕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자주 벌러덩 눕곤했다.



복도 끝에는 ‘연학실’이라 해서 공부하는 공간이 따로 있었다. 고등학교 교실보다 조금 넓은 공간에 줄지어 책상이 놓여 있었다. 학번순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공부는 오직 연학실에서만 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새벽 5시 40분이면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6시 10분까지 경건한 마음으로 성당으로 입장하라는 음악 소리였다. 불경스럽게도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방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옆방도 사정이 비슷했다. 기상 음악이 울렸지만 기숙사 전체가 조용한 것이 절간이 따로 없었다. 뭐지? 신학생들이 그래도 돼?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맞다. 말 참 잘 안 들었다.


기상 음악 소리를 듣고 경건한 마음으로 '발딱' 일어났던 적이 있긴 했다. 생 신입생 시절, 신학교와 허니문 시절을 보내던 그때는 음악 소리에 재깍 일어났다. 필요 이상의 경건한 마음과 함께.


기상 음악을 취침 음악처럼 들으며 계속 자다 보면 ‘요놈들 그럴 줄 알았지’하면서 한 번 더 음악 소리가 울렸다. 성당 입장 10분 전에 울리는 최후통첩이었다. 그 음악 소리를 듣고도 안 일어나는 사람은 ‘간땡이’가 좀 부은 신학생이었다. 10분 만에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얼굴에 뭐라도 바르고 성당으로 달려가 자기 자리에 앉기에는 빠듯했기 때문이다.


최후통첩이 울렸는데도 ‘누가 일어나 불을 켜면 일어나야지’ 하면서 미적거리다 보면 간땡이가 비교적 정상인 신학생이 일어나 불을 켰다. 그 불빛을 신호 삼아 우르르 일어났다. 복도에서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것도 그즈음이었다. 세면장은 복도 오른쪽 끝에 있었다. 30명 이상이 동시에 세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세면장이 가장 붐비는 시간은 6시에서 6시 5분 사이였다.


나는 간땡이가 많이 부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대개 더 잤다. 같은 방 친구들이 세수하고 방으로 돌아와 얼굴에 로션 같은 것을 바를 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곱 세수를 했다. 성당은 바로 아래층에 있었다. 내 침대에서 성당의 내 자리까지 걸어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 40초. 좀 방정맞게 걸어가면 50초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 계획이 있었다.


6시 10분부터 아침 기도와 아침 묵상, 아침 미사가 차례로 이어졌다. 아침 미사 시간에는 신학교에 상주하는 교수 신부님들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당시 학장 신부님이 얼마나 엄했는지 교수 신부님들도 우리만큼 신학교 생활이 고달프다고 하소연했다. 내가 봐도 힘든 것 같았다. 아침 미사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것만 봐도.


템플 기사단?


미사가 끝나면 맨 앞줄에 앉아 있던 7학년부터 퇴장해 식당으로 향했다. 전날 밤 끝기도 이후(8시 10분)부터 다음 날 아침 식사 전 기도 때까지 대침묵 시간이었다. 공식적으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연히 침묵 속에서 식당으로 향했다. 150여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내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만 났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기함을 하고 뒤로 자빠졌을지도 모른다.


5학년부터 수단이란 옷을 입었다. 수단은 목에서부터 검은 단추가 촘촘하게 달린 원피스 형태의 검은 옷이다. 그런 옷을 입은 남자들이 침묵 속에서 발소리만 저벅거리며 어두컴컴한 복도를 무리 지어 걸어간다고 상상해보라. 성당은 구관 3층 왼쪽 끝에 있었고 식당은 1층 오른쪽 끝에 있었다.


150여 명이 두 줄로 성당을 나가 식당까지 걸어가면 맨 선두가 식당에 도착할 즈음 맨 후미는 그제야 성당을 빠져나갔다. 식당부터 성당까지 거대한 인간 띠가 형성되는 셈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침묵 속의 긴 행렬, 한 손에 횃불만 들면 ‘성서 기사단’이니 ‘템플 기사단’이 따로 없었다.


맨 먼저 식당에 도착한 7학년 선배들은 1학년들이 식탁 앞에 설 때까지 기다렸다. 들리는 것은 오직 발소리뿐이었다. 잠시 뒤 온 사방이 조용해졌다. 전교생이 식탁 앞에 섰다는 신호다.


짧은 식사 전 기도가 시작되었다. 기도가 끝나는 순간 대침묵이 해제되었다. 비로소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아침에는 다들 바쁘기 마련이다. 수업 준비를 해야 하니까. 따라서 밥을 다 먹은 사람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점심과 저녁은 그렇지 않았다. 밥을 다 먹었다고 먼저 일어날 수 없었다. 같이 먹고 같이 일어났다. 밥 먹는 시간도 교육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신학교였다.


불경스러운 청소 방식?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 맡은 구역으로 달려가 청소를 했다. 청소 구역은 각 학년 미화부장이 임의로 정해 게시판에 붙여 놓으면 알아서 했다. 기상 음악은 습관적으로 또 집단으로 ‘개 무시’하는 신학생들이 그런 것은 참 잘 따랐다. 청소도 무척 열심히 했다. 일반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온 형들은 대학에 입학해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신학교에 와서는 맡은 구역을 청소해야 한다는 사실에 또 놀랐다고 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청소 시간에 우연히 3학년 화장실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나와 같은 교구 선배가 소변기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 선배는 소변기와 눈높이를 딱 맞춰 쪼그려 앉아서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의 등짝을 밀 듯 정성스럽게 소변기를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신학교에서 소변기 청소는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얼마 뒤 화장실 청소에 당첨되었다. 나는 3학년 화장실에서 본 기억을 되살려 그 선배 흉내를 냈다. 쪼그리고 앉아 소변기와 다정하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세제를 푼 물에 걸레를 빨아 여인의 등짝을 문지르듯 정성스럽게 닦았다. 여차하면 소변기를 끌어안기라도 할 것처럼. 스스로 생각해도 성의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와 같이 화장실 청소에 당첨된 두 명의 친구들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내가 소변기를 닦는 모습을 보고 뒤로 자빠지려고 했다. 그렇게 청소를 하면 어떡하냐고 했다. 급기야 한 명이 시비조로 따졌다.


“니 지금 뭐 하는 기고?”

“와?”

“화장실 청소를 화장실 청소처럼 해야지. 그라모 우짜노?”

“거기 무신 말이고?”

“물 찌끄리고, 솔로 문지르고, 물 찌끄리야지.”


그 친구는 내가 들고 있던 걸레를 냉큼 뺏어갔다. 두 친구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나의 ‘연인 등짝 닦기 형’ 소변기 청소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3학년 화장실에서는 자연스럽게 통하던 그 청소 방식이 1학년 화장실에서는 왜 안 통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아마 그렇게 청소하는 모습이 두 사람 눈에 불편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청소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기들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변기를 끌어안을 듯한 자세로 청소하는 내가 그들 눈에 심히 에로틱하게 보여 불경스럽게 느껴졌나? 어디 감히 신학교에서.


어쨌든 우리 세 명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화장실 청소를 했다. 무차별적으로 물을 찌그리고, 솔로 문대고, 무차별적으로 물을 찌끄려 마무리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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