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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제수업 04화

1라운드 탈락자들

것도 대학이라고 다니냐?

by 우연의 음악

2학기가 시작되었다. 다시 월수금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다. 라틴어 시간은 여전히 공포스러웠다. 1학기 때 ‘C씩’이나 받고, 방학 동안 ‘학사님’ 소리도 들으면서(신자들은 신학생을 그렇게 불렀다) 있는 대로 폼을 잡다가 왔다. 그런데도 라틴어가 든 날이면 어제 입학한 신입생 모양 기분이 쪼그라들었다. 참 잘 적응되지 않았다.

라틴어 신부님의 쌍욕 수준의 인신공격성 질책은 수위가 더 높아져 있었다. 방학 동안 라틴어 책에 손도 안 댄 것을 귀신같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손을 댈 수 없었다. 아예 책을 안 가져갔으니까). 그에 대한 복수 심리가 작용해서일까, 신부님은 수업시간마다 화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화석화된 줄 알았던 라틴어 미사와 라틴어 성서를 부활하겠다는 바티칸의 발표라도 있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1학년들은 좀비처럼 동사 변화를 중얼거리며 학교 안을 돌아다녔다. 라틴어 진도가 나갈수록 외워야 할 동사 변화가 많아졌다. 화장실 정면에만 붙어 있던 동사 변화표가 양옆에도 막 붙었다. 옛날 공중변소에 낙서되어 있던 ‘음담패설’을 읽는 기분으로 꼼꼼하게 동사 변화표를 읽어보는 날이 많아졌다.


1학기 때처럼 공부해서는 2학기 때는 낙제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재에 나오는 라틴어 문장이 점점 복잡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라틴어 신부님의 화끈한 수업 분위기를 ‘1학기는 용케 넘어갔지 이놈들아. 2학기는 좀 다를 거야, 기대해’라는 협박으로 알아듣는 나의 편집증적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KakaoTalk_20220410_112454109.jpg 화장실에 가면 서당에 들어간 듯 라틴어 동사 변화표 외우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다.


공부 방법을 바꿨다. 외출 날 밖에 나가 두꺼운 노트를 한 권 사 왔다. 노트를 반으로 접은 다음, 한쪽에 라틴어 단어를 쓰고 반대쪽에 뜻을 적었다. 라틴어 교재에 나오는 단어를 모두 썼다. 틈만 나면 외웠다. 틈만 나면 뜻을 가리고 혼자 테스트를 했다. 외운 단어에는 엑스 표를 했다. 못 외운 단어에는 동그라미표를 했다. 지극정성으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엑스가 많아졌다. 한 번 못 외울 때마다 동그라미를 그렸더니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에는 동그라미가 수도 없이 붙었다. 노트는 아주 유용했다. 시험 전날 동그라미가 많이 붙은 단어만 집중적으로 공부하면 되었으니까.


순식간에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또 순식간에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시험도 번개같이 끝났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 방학도 왔다. 집으로 간 지 며칠 뒤 성적표가 날아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개봉했다.


‘와우!’


C+였다. 1학기보다 성적이 더 좋았다. 공부 방법을 바꾼 것이 유효했다. 신학교를 다 마치고 신부가 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2학년 때 배워야 하는 희랍어와 3학년 때 배워야 하는 히브리어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정보에 따르면 라틴어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담당 신부님들이 무척 신사적이고 종교적인 분들이라고 했다.


14명이 짐을 싸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로 갔다.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흉흉한 소문의 근원지는 라틴어였다. 무려 15명이 F를 맞았다고 했다. 일반 대학에서는 C도 맞기 어렵다는 것이 대학 학점이라고 했는데 D도 아니고 F라니. 그것도 58명 중에서 15명이라니. 놀라 자빠질 숫자였다. 내가 맞은 C+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라틴어 이야기를 너무 오래 했다. 그 말고도 재미난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간단히 결론만 이야기하고 라틴어 이야기는 끝낼까 한다.


F를 맞은 15명 중에서 14명이 퇴학을 당했다. 단 한 칼에. 그렇게 이야기하면 믿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아니 그 학교는 정식 대학이 아닌가 봐? 정식 대학이라면 학칙이 있을 테고, 두 번 유급을 당해야 최소한의 퇴학 자격이 갖춰지는데(1학기 때 라틴어 F받은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어째 1학년이 한 번 F 맞았다고 퇴학을 당하지? 사이비 대학 아냐?” 끝에 가서는 ‘것도 대학이라고 다니냐?’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다른 신학생들이 2학년 기숙사로 짐을 옮기느라 바쁜 와중에 14명의 F들은 짐을 싸서 집으로 갔다. 엄연한 팩트다. 대구 신학교는 교육부 인가를 받은 정식 대학이었다. 동기 중 수석 입학한 대구교구 모 신학생은 학력고사 점수가 무려 320여 점이었다. 체력장 점수까지 합해 340점 만점이던 시절이었다. 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15명 중 1명만 퇴학을 면했다. 그 이유를 두고 쑥덕공론이 벌어졌다. 그 가운데 나름 그럴듯했던 공론 하나가 ‘녀석이 축구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라틴어 신부님이 해병대 출신임을 기억할 것이다. 체육 수업도 겸했다는 것도 기억할 것이다. 라틴어 신부님은 라틴어를 잘하는 학생도 귀여워했지만 해병대 출신이라 그런지 운동, 특히 축구를 잘하는 학생도 대 놓고 편애했다.


라틴어 F를 맞고도 살아남은 녀석은 학교 내에서 유명한 스트라이커였다(신학교에서는 봄과 가을에 체육대회, 학년별 축구 대회, 방별 족구대회, 농구대회 등 대회가 무척 많았다). 물론 노상 상대편 골대 앞에서 얼쩡거리며 “날 좀 이용해, 날 쫌!”하면서 성질만 내는 녀석이었다. 그러다가 얼결에 제 앞에 툭 떨어지는 공을 툭 차 넣는 것이 주특기였다. 어쨌거나 골 결정력은 아주 좋았다.

그런 이유로 라틴어 신부님이 녀석만 자기 방에 불러 급하게 라틴어 시험을 다시 치르게 하고 학점을 줘서 2학년으로 올라가게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어느 것 하나 확인된 것은 없다.

1학년을 마치고 나자 다른 학년을 압도했던 58명의 대규모 신입생 군단은 43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왜 44명이 아니고 43명일까? 예비역 형 중에 한 사람이 1학년도 아니고 1학기를 마치고 일찌감치 짐을 쌌기 때문이다. 그 형과 유난히 친했던 관계로 밖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왜 나갔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생각했던 곳과 영 다르더라고.”


‘라틴어 시간이 무서워서’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대답을 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달랐던 것일까?’ 궁금했다.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신학교와는 비슷했기 때문이다. 라틴어 수업만 빼고. 그렇게 그 형은 뭐가 다른지 풀어야 할 큰 숙제를 남겨주고 가버렸다.

58명이 입학해 43명이 2라운드, 아니 2학년으로 올라갔다. 남은 사람들은 무사히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신부가 될 수 있었을까?


에필로그


어느 날 학교에 큰 손님이 왔다. 교황 대사였다. 바티칸은 도시 국가다. 전 세계에 대사관이 있어 대사를 파견한다. 정치인이 아니고 교황의 뜻을 전하는 대주교가 대사인 것이 다를 뿐이다.

주한 교황 대사가 새로 부임을 하면 대개 전국의 신학교를 방문했다. 신학생 교육을 잘하고 있는지 ‘감시’ 차원의 방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대구 신학교를 찾아온 교황 대사는 전교생을 모아 놓고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을 했다. 미사는 라틴어로 했고, 강론도 라틴어로 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다행히 미사를 벽보고 하지는 않았다.


교황 대사가 라틴어로 강론을 하는 동안 제단 위에는 학장 신부님을 중심으로 10여 명의 교수 신부님들이 양옆으로 쭉 앉아 있었다. 제단 밑에는 통역하는 신부님이 서 있었다.


라틴어 강론이 시작되었다. D만 받아도 에헤야디야 할 라틴어에서 감히 C와 C+를 받았던 나였다. 그런데 이런 젠장! 교황 대사의 라틴어 강론을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2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가 3학년으로 복학했을 때라 배운 지 좀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했다. 해병대 출신의 라틴어 신부님이 인신공격성 질책을 남발해가면서까지 공부시켰던 교수법이 별로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통역을 했던 신부님도 해병대 출신의 그 라틴어 신부님이 아니었다. 라틴어와 전혀 상관없는 과목을 강의했던 신부님이었다. 해병대 신부님이 라틴어를 가르치기는 했지만 옛날 고등학교 영어 선생들처럼 말은 한마디도 못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순간이기도 했다.

교황 대사의 강론이 우리만큼 지루했는지 학장 신부님을 비롯해 십여 명의 교수 신부님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졸기 시작했다. 교황 대사야 뒤통수에 눈이 없었으니 몰랐겠지만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우리는 심히 민망했다. 그때였다. 통역 신부님이 교황 대사의 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순간, 졸고 있던 신부님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뭔 일이지? 교수 신부님들은 통역 신부님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더니 째려보았다. 형이상학을 강의했던 신부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손짓까지 해 가며 “그게 아니고 OO지”라고 했다.

뭐야? 자는 줄 알았더니 다 듣고 있었던 거야? 나야 통역하는 신부님이 맞게 하는지 틀리게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당연히 형이상학 신부님이 지적한 ‘OO’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10여 명의 신부님들이 보여 준 일사불란한 행동을 보고 그들이 교황 대사의 말을 다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때 통역 신부님이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교수 신부님들이 그 정도의 라틴어 실력을 갖고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영어와 달리 도대체 실력을 뽐낼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 다행히 통역 신부님의 아름다운 실수로 자신들의 라틴어 실력을 학생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뽐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들이 유쾌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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