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를 모르면 신부가 될 수 없었던 시절이 있다
1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갔다. 며칠 뒤 성적표가 날아왔다. 라틴어를 못 하면 신학교에서 쫓겨난다고 했던 선배들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도대체 그놈의 라틴어가 뭐라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라틴어를 왜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신학생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얼른 이해가 갔다.
1962년 10월, 로마에서 ‘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것이 열렸다. 전 세계 가톨릭 신학자들과 주교들이 모여 1965년 9월까지 3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지 것들을 새로 정한 회의였다. 이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교회가 새롭게 태어났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있다. 한마디로 가톨릭 교회의 대변혁을 이룬 공의회였다.
공의회 이전에는 성당의 제대가 벽에 붙어 있었다. 사제는 신자들을 등지고 미사를 했다. 고대 제사장들이 제사 지내는 것과 비슷했다.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만 했다. 신자들은 뜻도 모르는 라틴어로 신부님의 말에 응송으로 답했다.
미사는 신부님과 신자들이 말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개신교 신자들은 예배 때 가만히 앉아 ‘아멘’만 하고 찬송가만 부르면 된다. 미사는 다르다. 성가도 부르고, 신부님의 말에 적절한 응답도 해야 한다. 일어섰다 앉았다도 여러 번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서 있는데 혼자 앉아 있으면 ‘똘아이’가 된다. 다들 앉아 있는데 혼자 서 있으면 사람들이 웃는다(가끔 맨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른다).
신부님의 말에 응답해야 하는 부분은 대개 ‘아멘’처럼 간단하지만 제법 긴 것도 있다. 그런 말을 라틴어로 했다고 상상해보라. 물론 미사 경문이기 때문에 답해야 하는 문장은 정해져 있다. 또 늘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절로 외워지게 된다. 불교의 염불처럼. 그래도 그렇지. 라틴어라니!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도 여든이 넘었을 때까지 ‘메아 꿀빠, 메아 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말은 미사 도중 신자들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부분에서 외는 미사 경문의 한 구절이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는 뜻이다. Mea(메아)는 ‘나의’라는 뜻이고, Culpa(꿀빠-라틴어에서 P나 T, K, C같은 폐쇄음은 된소리로 발음한다. 그래서 ‘쿨파’가 아니고 ‘꿀빠’다)는 잘못, 허물이란 뜻이다. MaXima(막시마)는 영어의 MaXimum(맥시멈)과 같다고 보면 된다.
성서도 라틴어로 된 것을 신부님이 읽고 신자들에게 설명해 주는 식이었다. 당연히 일반 신자들은 성서를 읽을 수 없었다. 공식 문서도 모두 라틴어였다. 한마디로 라틴어를 모르면 신부 노릇을 할 수 없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신자들을 등지고 하던 미사는 신자와 마주 보고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각국의 가톨릭 교회들은 각자 자기 나라 말로 미사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신자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체 신부님의 말에 ‘메아 꿀빠’라고 답하는 대신 ‘내 탓이요’라고 하게 되었다. 성서도 자기 나라 말로 번역된 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신부님은 미사 시간에 한글로 된 성서를 읽고 설명해 주었다. 글을 아는 신자들은 성서를 사서 집에서 혼자 읽을 수도 있었다. 천지가 개벽한 셈이었다. 신부님 입장에서는 라틴어를 못 해도 신부 노릇하는데 별 지장 없게 되었다.
천지개벽의 여파가 신학교라고 피해 갔을까? 그런데도 (망할 놈의) 신학교 라틴어 교육은 공의회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25년도 더 지났을 때다. 그런데도 라틴어 교육만큼은 여전히 ‘빡세게’시키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서슬 퍼렇던 라틴어도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힘을 잃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교회 언어로서의 중요성이 본질은 사라지고 해병대 신부님의 인신공격성 질책의 형태로 화석화되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 화석도 세월이 지나면서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3학점이든 라틴어가 2학점으로 줄어든 것을 보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성적표를 열었다. 라틴어 과목부터 살펴보았다. 다른 과목은 안중에 없었다.
‘야홋’
C학점이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일반 대학에서는 대 놓고 교수에게 욕을 하지 않는 다음에는 잘 받기 힘든 것이 C학점이라고 했다. 교수들이 제자들의 취업을 걱정해 학점을 일괄적으로 상향 조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학교는 달랐다. 신부가 되려고 온 학생들뿐이니 교수 신부님들이 제자들의 취업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졸업만 하면 100% ‘취업 보장’이었다. 그저 실력대로 점수를 주기만 하면 되었다. 자연히 신학생들의 성적표에는 C, D가 수두룩했다.
D라도 받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C를 받았으니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방학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두 달 내내 원 없이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