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은 라틴어만 잘하면 돼
고등학교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신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학한 신학교는 대구에 있었다. 우리끼리는 그냥 ‘신학교’라 했지만, 정식 명칭은 ‘대구 가톨릭대학 신학과’였다. 가톨릭 신부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 기관이었다. 과 하나가 대학 전부인, 이른바 단과 대학이었다. 당연히 신부 지망생들만 다녔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리둥절하던 신입생 시절,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1학년은 라틴어만 잘하면 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학년 때 24학점을 들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4시간 내리 수업이 꽉 차 있었다. 그렇게 많이 공부했는데도 기억나는 것은 라틴어뿐이었다.
라틴어는 3학점이었다(요즘은 2학점이더군). 나중에 알았다. 일반 대학에서는 3학점짜리 수업은 하루에 몰아한다는 것을. 신학교 라틴어 수업은 월, 수, 금요일에 들어 있었다. 일반 대학처럼 하루에 내리 3시간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을까? 웃자고 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상상이다.
해병대 출신의 라틴어 신부님
라틴어 수업을 맡았던 교수님은 40대 중반의 청주교구 신부님이었다. 청주교구 신학생 지도 신부님이기도 했기에 학교 안에서 신학생들과 같이 생활했다(신학생들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한다). 해병대 출신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라틴어 신부님은 교양 과목으로 이수했던 체육 수업도 겸했다. 일반 대학의 체육 수업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안 다녀봤으니까. 라틴어 신부님의 체육 수업은 무척 ‘빡셌다’. 1학기 중간고사 시험 문제가 1,500m 달리기였다. 땡볕에 침을 흘리며 운동장 다섯 바퀴를 뛰었다.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느님의 은총이 눈에 보일 정도로 충만하기 짝이 없어야 하는 곳이 신학교다. 대개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실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신학생으로서 차마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이 틀림없겠지만, 월요일 아침 눈을 뜨면 ‘지옥 비슷한’ 곳에서 잠을 깬 기분이었다. 라틴어 수업이 있는 날이란 이유로. 그런 현상은 수요일과 금요일도 비슷했다.
라틴어는 신학교에서 교양 필수 과목이었다. 학점을 따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었다. 졸업을 못 한다는 것은 신부가 못 된다는 이야기다. 신부가 되고자 들어간 학교에서 신부가 될 수 없다면 그 학교에 계속 다닐 이유가 없었다.
신학교는 일반 대학과 달라 계절 학기라는 것이 없었다. 2학년이 1학년 강의실에 들어가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다. 학업과 생활 지도가 학년별로 똘똘 뭉쳐 이루어졌다. 고등학교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라틴어는 무조건 1학년 때 학점을 따야 했다. D를 받더라도. 근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음악이 울리고 라틴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반 대학은 학생이 강의실을 찾아다닌다고 하더니만 신학교는 달랐다. 고등학교처럼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교수님들이 찾아왔다. 강의실 풍경도 고등학교와 거의 똑같았다.
드디어 신부님이 들어오셨다. 1주일에 세 번씩 듣는 수업이었지만 라틴어 수업은 늘 낯설었다. 해병대 출신의 라틴어 신부님, 크지 않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가무잡잡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많은, '소도둑놈이 저렇게 생겼겠구나'하는 얼굴이었다.
신부님 손에는 노란색 표지의 라틴어 교재가 들려 있었다.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던 전설의 허 모 신부님이 썼다는《초급 라틴어》였다. 표지 날개도 없는, 옛날 국정 교과서 판형의 책이었다. 교재는 장별로 되어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로 된 본문이 두세 쪽에 걸쳐 나왔다. 본문이 끝나면 연습문제가 나왔다. 해석 5문제 작문 5문제.
심플했던 라틴어 수업
라틴어 수업은 아주 심플했다. 5분 강의에 45분 질문. 신부님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날 배울 내용의 문법을 아주 빠르게 설명했다. 대개 5분 정도. 아무리 길어도 10분을 넘지 않았다. 강의는 금방 끝나고 질문 시간이 시작되었다. 질문 시간이라 해서 대단한 것을 묻고 격조 높게 답하는, 외국 영화에 나오는 그런 우아한 장면을 상상했다가는 큰일 난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라틴어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시작을 어디서부터 하느냐가 중요했다. 80년대 고등학교 교실 마냥 58명의 1학년들이 둘씩 짝지어 앉아 있던 강의실. 라틴어 신부님은 대개 ‘거기서부터’ 하면서 눈과 턱으로 한 학생을 가리켰다. 스타트로 지목된 학생은 본문의 첫 번째 문장을 읽고 해석했다. 그 학생은 가장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예습을 안 했다 해도 첫 문장도 안 할 정도로 간 큰 신학생은 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학생이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사이, 뒤에 앉은 사람은 재빨리 두 번째 문장을 읽고 해석할 준비를 했다. 첫 번째 학생이 잘 읽고 잘 해석하면 신부님은 ‘그 뒤에’ 했다. 가끔은 ‘그 옆에’라고 할 때가 있어 양옆에 앉은 학생들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뒤에 앉은 학생이 두 번째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사이, 그 학생 뒤에 앉은 사람들은 얼른 순서를 헤아려 자신이 읽고 해석해야 할 문장을 찾아 연습하기 바빴다. 수업은 뒷전이었다. ‘뒤에’를 연발하던 신부님이 갑자기 ‘옆에’하는 바람에 실컷 준비했던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때도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었다. 하느님 뜻에 맡기는 수밖에.
강한 긴장감 속에서 마침내 내 차례가 오기 마련이다. 한정된 강의실 안에서 라틴어 신부의 ‘뒤에’, 또는 ‘옆에’를 피해 갈 곳은 없었다. 다행히 무사히 읽고 해석하기를 마치면 수업 중간인데도 마치 수업이 끝난 것처럼 몸과 마음에 평화가 몰려왔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해석하는 것을 살펴볼 여유도 생겼다. 58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하루에 두 번 걸리는 경우는 없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안 걸리고 넘어가는 날은 있어도.
수업 중에도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자신이 읽고 해석할 문장을 찾느라 호들갑을 떨었지만, 사실 1학년들은 대부분 혼신의 힘을 다해 예습을 해 갔다. 라틴어 수업이 하루 건너 씩 있었던 것은 그 시간 동안 충분히 예습하라는 신부님의 배려였다. 1학년 라틴어와 체육만 강의했던 신부님이었으니 수업을 하루에 몰아버리면 나머지 시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쓸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배려를 해 주었는데도 물리적으로 완벽히 예습하기에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다른 과목은 다 팽개치고, 신학교 안에서 공부 말고 해야 할 일들을(뒤에 나오겠지만 아주 많다) 제외한 모든 시간에 라틴어 공부만 해도 모자랐다.
라틴어 신부님의 ‘그 뒤에’에 따라 순서대로 문장을 읽고 해석하다 보면 본문이 끝나고 연습문제에 걸리는 경우가 있었다. 5개의 해석 문제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5개의 작문 문제가 문제였다. 작문 문제를 능숙하게 풀기 위해서는 그날 새로 나온 동사의 변화를 완벽하게 외우고 있어야 했다.
예습을 하지 않고 라틴어 수업에 들어간다는 것은 ‘빡센’ 신학교 생활에 정신줄을 살짝 놓아버렸거나, ‘미안하지만 난 이쯤에서 그만 짐 싸기로 했네’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따라서 라틴어 수업은 탱탱한 풍선처럼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긴장감은 대개 긴장 상태로 끝났다. 그만큼 1학년들은 라틴어 신부님을 필요 이상으로 만족시켜 주기 위해 눈물겨울 정도로 열심히 예습해 갔다.
하지만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엉뚱하게 해석을 하거나, 작문을 제대로 못 하는 학생이 나왔다. 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 진짜 정신줄을 놓아버렸거나, 짐 쌀 각오를 했거나, 이유 없이 하기 싫었거나, 한다고 했는데 부족했거나, 심신이 미약해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져 버려 말문이 막혀 버렸거나(이런 신학생들이 진짜 있었다). 그런 신학생들이 라틴어 신부님의 해병대 본성을 자극했다. 긴장 상태의 강의실이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