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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사제수업 07화

식당은 제 2의 강의실

신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의 8할은 식당에서 배웠다

by 우연의 음악

신학교 식당은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는 공간이었다. 교수 신부님들이 신학생 시절에는 식사 교육이 아주 엄격했다고 한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가야 했다나 어쨌다나. 로봇처럼 먹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 교육을 했는지 모르지만 신학교 식당은 늘 약간의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은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식당에는 4인용 식탁을 4개씩 붙인 16인용 식탁이 10개쯤 있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마치고 줄지어 식당에 들어서면 4인용 식탁을 기준으로 똑같은 밥과 국과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퍼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16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1번부터 10번까지. 이 식탁 안에서는 아무 데나 앉을 수 있었지만 1번부터 10번까지의 식탁 가운데 어디에 앉을지는 개인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그 권한은 위생부장에게 있었다. 위생부장은 5학년이었다.


위생부장은 학년과 교구를 따져가며 골고루 섞여 앉게 식탁 자리를 짠 뒤 식당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생부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무 자리에나 앉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게시문을 보고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가보면 1학년부터 7학년까지, 각 교구생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약간의 긴장감과 즐거움과 해학이 있는 시간


내 앞에 앉은 사람이 2학년 선배라면 나이가 한 살 차이라 같이 밥을 먹는데 큰 부담이 없다. 7학년 선배가 앉아 있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7학년이면 나이가 거의 서른에 가까웠다. 신학교를 7년째 다니는 중이었고, 그 사이 군대도 갔다 왔을 테니까. 만약 그 선배가 사회생활을 하다가 들어온 사람이라면 서른 중반을 넘어 불혹의 나이에 근접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선배들이 가끔 있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들어온 신입생과 내일모레 신부가 되어 학교를 떠날 7학년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보라. 여기에다 우연히 7학년 옆에 6학년이 앉아 있고, 바로 옆에 5학년이 앉아 있기라도 한다면 신입생 처지에서는 라틴어 신부님과 밥을 먹는 것만큼 불편할 것이다. 신학교 식당에 늘 약간의 긴장감이 감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신입생 시절 한동안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KakaoTalk_20220413_113236753.jpg 신학교 식사 시간은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해학이 교차하는, 전반적으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긴장감은 몇 주 가지 않았다. 일반 대학이 아니라 신학교였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신부가 되려고 온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신부는 이론적으로 신자들, 곧 넓은 의미에서 타인을 위해 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자기만의 가족을 만들지 않겠다고 독신 서약까지 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단체로 교육받는 곳이 신학교였다. 성깔도 있고, 제법 후배들에게 까칠하게 구는 선배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됨됨이가 평균 이상은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뜻이다. ‘개차반’ 같은 신학생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내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좀 놀기는 했지만 개차반은 아니었다).


‘개차반’은 없다고 했으니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어느 집단에나 개차반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개차반은 아예 입학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 신학교다. 신학교는 대학이었지만 대입 시험을 치르고 커트라인을 통과했다고 누구라도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에 가르면 중학교부터, 늦어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뭘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중에 신학교에 갈 거예요’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정도다. 그리하여 같은 성당에 다니는 신자들이 ‘저 녀석 나중에 신학교에 간대’라는,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은 쑥덕거림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신학교에 가기 위한 기본 준비다. 그 쑥덕거림이 계속되고 널리 퍼지다 보면 쑥덕거림의 질과 내용이 달라진다.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그래, 거시기는 신부님 감이지. 암, 신부님이 뭐야, 주 교감이야 주교.”

“뭐시라? 거시기 그놈이 신학교에 간다고? 그 자식이 신부가 되면 내가 절에 간다 절에.”


쑥덕거림이 어떻든 신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공개 선언을 한 뒤 교구에서 주관하는 ‘성소 모임’에도 나가야 한다. ‘성소聖召’란 글자 그대로 하면 ‘거룩한 부르심’이란 뜻이다. 이 모임은 신학교에 가고자 하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교구 차원에서 관리하는 모임이다. 성소 모임은 교구청에서 정기적으로 열린다. 신학교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은 이 모임에 참여해야 한다. 성소 모임에 한 번도 가지 않은 학생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소 모임에 참여한다고 모두 신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다. 성소 모임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 실제로 신학교 입학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극소수다. 이런 예비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그 해에 어느 본당의 누가 신학교에 가는지 교구에서는 이미 파악을 하기 마련이다.


니깟놈이 무슨 신학교에 간다고


내가 신학교에 다닐 당시 마산교구의 한 해 평균 신학교 입학생은 예닐곱 명이었다. 교구 전체에서 예닐곱 명이라면 지원자 중에 ‘개차반’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신부가 될 만한 학생에게 본당 신부님이 추천서를 써 주고, 그 추천서를 갖고 신학교에 지원 해(신학교 입학을 위해서는 대입 성적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추천서다) 입학한 사람들이 신학교에 모여 있었으니 기본적으로 개차반이 있을 가능성이 적은 것이다.


한편, 제 입으로 신학교 간다고 오래전부터 떠들고 다녔고, 교구 성소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한 학생이긴 하지만 ‘그놈이 신부가 되면 내가 절에 간다’는 쑥덕공론 평가를 받은 학생이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하면 본당 신부님은 난감할 것이다. 써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사실 이론적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어렵다. 그런 학생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면, 그 학생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부모가 ‘니깟 놈이 무슨 신학교에 간다고 그러냐’며 자체 검열을 통해 잘라 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그런 학생이 추천서를 써 달라는 일이 벌어진다면 모르긴 해도 자식과 부모가 짜고 ‘그래, 넌 신학교나 가서 공짜로 대학 공부나 하고 오느라’라고 공모했을 가능성이 크다. 신학교에서 받는 대학 교육과 기숙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교구에서 부담했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런 일도 현실적으로 벌어지기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입학 당시에는 신부가 될만한 자질과 능력이 있다고 검증된 학생들이 신학교에 입학했다. 개차반은 없다고 나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학생들의 입학 전 역사가 이러했으니, 나이 차이가 10년 이상 나는 선후배들이 한 식탁에 앉아 허구한 날 같이 밥을 먹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같이 뒹굴며 살아도 운동부 합숙소처럼 험한 말이 오가거나 밤중에 집합을 당해 ‘빳따’를 맞는 그런 경우는 없었다. 그보다는 식탁 공동체인 만큼 화기애애하고, 말 그대로 한 형제들이 집에서 밥을 먹는 것과 비슷한 곳이 신학교 식당이었다.


식탁은 인간관계 급속 배양소


16명이 같은 식탁에서 계속 밥을 먹다 보면 서로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된다.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서 선후배 사이에 끈끈한 정이 생기고, 저학년들은 고학년들로부터 다양한 사교육을 받았다.


범생이류들이야 궁금해하는 것이 뻔했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는냐,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은혜가 충만한 신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냐, 묵상이나 기도를 더 잘할 수 있는 비법이 있느냐 등등. 나도 그런 질문들을 많이 했다. 다만 범생이류들과 달리 성의 있게 대답해주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잘 귀담아듣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몇몇 교수 신부님들의 ‘습성’과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때는 귀가 번쩍 뜨였다.

교수 신부님들 중에는 스텔스 전투기처럼 소리 없이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신학생들이 제시간에 정해진 것들을 잘하고 있는지, 대침묵 시간에 숨어서 떠들지는 않는지, 낮 시간에 침실에 들어가 자빠져 자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신부님들이 있었다. 물론 많지는 않았다. 신학생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아주 극소수의 신부님들이 그런 ‘습성’을 보였다. 선배들은 그런 신부님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대해 알아두면 요긴할 때가 많다고 했다. 나는 굉장히 귀담아 들었다.


16명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끈끈한 형제애를 다지다 보면 말이 잘 통하는 선배들이 생긴다. 교제 범위가 넓어지면서 신학교 생활은 훨씬 다이내믹해진다. 대침묵 시간에 독방 생활을 하는 고학년 선배 방을 도둑고양이처럼 찾아가 라면을 끓여내라, 숨겨놓은 과자를 내놔라 하기도 한다(이럴 때 잘못하면 스텔스 신부님에게 걸리게 되는 것이다. 스텔스 신부님의 습성과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대해 알아두는 것은 그래서 중요했다). 선배들은 그런 후배들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피포트에 라면을 끓여주고, 숨겨놓은 과자를 주기도 했다.


선후배 사이의 이런 행복한 관계를 질투(?)하는 사람이 있었다. 위생부장이었다. 선배와 후배가 작당해 신학교 규칙을 어기고, 감히 대침묵 시간에 숨어서 라면을 끓여 먹어? 위생부장은 식탁 자리를 바꿔 버렸다. 그동안 같이 앉아 밥을 먹었던 16명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런 다음 전혀 다른 16명으로 조합을 맞춘 식탁 자리를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만행도 그런 만행이 없었다. 그렇다고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위생부장의 권한은 막강했으니까.


새로운 16명은 탐색 과정을 거치고, 기본적인 정보를 교환하면서 또 서로를 알아갔다. 그러다가 3주가 지나면 위생부장은 또 찢어 놓았다. 그렇게 식탁을 5번쯤 바꿔 앉다 보면 한 학기가 끝났다. 이론적으로 서로 다른 75명과 3주씩 같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밤에 몰래 찾아가 커피포트 라면을 끓여내라고 할 수 있는 선배들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학교에 재학 중인 신학생이 평균 150명쯤 된다고 했다. 전교생의 반 이상과 3주 동안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은 셈이다(이걸 7년 동안 계속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렇다고 나머지 70여 명은 전혀 알 수 없을까? 그건 아니었다. 같은 학년은 기본적으로 잘 알았고, 같은 교구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교구생끼리는 자주 만났다. 교구에 큰 행사가 있으면 같이 가기도 하고, 교구생끼리 단합대회를 가지기도 했다. 각종 동아리도 많았다. 동아리 선후배들은 같이 밥을 먹지 않아도 서로 잘 알았다. 따라서 아직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지 못한 70여 명 중에도 잘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한 학기만 지나면 저절로 전교생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곳이 신학교였다.


이런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식탁에서 참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1학년을 무사히 보내는 방법은 2학년들에게 물어보면 따끈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2학년을 무사히 보내는 방법은 3학년들에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신학교 생활의 어려움과 슬럼프를 이겨내는 방법 같은 차원 높은 고민부터 해병대 출신의 라틴어 신부님에 대한 사소한 정보까지 모두 식탁에서 통용되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내가 신학교에서 배운 것의 8할은 강의실이 아니라 식당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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