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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Dec 31. 2020

무덤 그만 파고 해야 할 일들을 해.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4단계 : 선택과 집중

"선생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다음 학기 수업을 못 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네... 둘째가 좀 자주 아파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진짜 죄송한데 당분간은 제가 이 일을 함께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네... 둘째가 자주 아파서요. 지난번에도 제가 없을 때 경기(경련 혹은 발작)하고 응급실 다녀오고 해서 엄마랑 남편이 되게 고생했거든요. 길게 자리를 비우는 일은 당분간 어려울 것 같아요. 너무 죄송합니다."




  언제까지고 현실 부정과 자책에 빠져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눈앞의 시간들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슬픔에 매몰돼 내 시간이 멈추었다고 해서 우주의 시간이 그런 나를 마냥 기다려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마음이 지하 몇 층에 떨어져 있든지 간에 내 몸은 출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둘째의 재활 스케줄을 챙겨야 했다. 

  당시 나는 취직한 지 1년도 채 안 된 사이버대학교의 (비정규직, 비전임, 파리 목숨보다 못한) 교수였고, 다른 대학에도 외부 출강을 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는 전일제 직장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주 3일은 소속 대학에 전일제로 묶여 있었고 외부 강의 때문에 다른 날도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안정적인 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연구도 게을리하면 안 됐다. 지속적으로 논문을 써야 했다.


  결단이 필요했다. 남편은 전일제 직장인이니까 내가 일을 줄여야 했다. 둘째의 재활치료를 시작하기 전과 같은 스케줄을 이대로 계속 안고 간다면 아이들을 봐주시는 우리 엄마가 백기를 들거나 쓰러지실 것이다. 나도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 내지 못할 게 뻔하다. 무엇보다, 소중한 첫째가 방치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가족이 탄 배가 서서히 좌초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계속 달릴 줄밖에는 몰랐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경쟁 공화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어라 열심히 해야 그나마 평타를 치지 않던가. 일도 공부도 내려놓을 줄 모르고 거절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내려놓아야 했다. 가족이, 내 삶이 좌초되지 않도록 하려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해야 했다.

  우선, 외부 강의를 거절하기 시작했다. 이미 약속해 놓은 일도 거절했다. 최소한만 하자. 둘째의 재활치료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갔고 또 우리를 대신한 엄마의 돌봄 노동에 대해 감사를 표시해야 했기에 일을 완전히 다 놓을 수는 없었다. (재산이 제로에 가까운 우리 부부는 둘이 열심히 벌어야 먹고사는 개미 부부다.) 소속 대학의 일과 최소한의 외부 강의만 남겨두고 다 거절했다. 물론 연구와 논문도 내려놓았다. 이것도 최소한만, 안 잘릴 만큼만 한다. 더 안정된 자리를 찾는 건 사치였다. 잘 붙어나 있자.


  거절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둘째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웠다. 나도 알게 된 지 고작 몇 달 안 되었을 때라 머리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말을 남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발달장애'라는 말은 쉽게 입에서 안 떨어졌고 '뇌병변', '뇌전증'이라는 말은 듣는 이에게 너무나 생경하고 또 무거웠다. 섣불리 이 단어들을 꺼냈다가는 그 무게에 짓눌려 정작 필요한 말들을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말보다 눈물이 먼저 줄줄 흐르지 않게 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을 잘 모르는 상대에게 단순히 '아이가 느리다', '아이가 자주 아프다', '응급실에 자주 간다'고 이야기했을 때에는 "아유, 힘들겠다. 근데 애들은 원래 다 아프면서 크는 거다, 느려도 또 금방 잘 클 거다, 000 교수님은 시어머니가 아이들 다 봐주시고 그렇게 독하게 공부하시고 일 다 하시고 했다더라, 지금 잠깐이다, 지금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이다......" 등의 (무례한) 이야기를 되돌려 받기도 했다. 그럴 땐 '아이가 장애를 가졌다, 단순히 느리게 크는 게 아니다' 하고 재차 설명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모르더라.

  좋은 분들도 많았다. 쉽지 않은 나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괜찮다, 아이 먼저 챙겨라, 네가 걱정이다... 해 주시는 분들 덕에 그 시간들을 견뎠던 것 같다. (이 문장을 쓰는데 순간 다시 울컥, 눈물이 나올 만큼 내 말을 존중해서 들어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다.)


  그렇게 나는 선택과 집중을 수행하여,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내가 아이의 재활치료를 라이딩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했다. 어느 날은 낮에 재활 갔다가 야간 수업을 하러 나가기도 하고, 어느 날은 1교시 수업 후 바로 퇴근해서 점심도 못 먹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물론 그밖에 대부분의 시간들은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시거나 홈티 시간에 함께 계셔 주셨기에 아슬아슬하게나마 일과 '느린 육아'를 병행할 수 있었다. 둘째에게 입원 치료와 낮병동을 못 해 준 게 아직도 깊은 한이 되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주 5일 전일제 직장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을 탄력적으로 쓸 수 있었다. 만약 엄마든 누구든 도와주시는 분이 안 계셨다면, 그리고 주 5일 회사에 매인 몸이었다면, 내가 남편보다 많이 벌지 않는 한 분명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맞벌이 부부의 경우, 장애아이 돌봄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운영하는 '장애아이돌보미' 제도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득 기준이 있어서 웬만한 맞벌이 가정은 지원조차 해 볼 수 없다. 웃기지 않는가? 돌봄 지원이 절실한 건 맞벌이 부부도 마찬가진데, 돌봄 혜택을 받으려면 한쪽이 일을 그만두어 소득을 낮추거나 아주 낮은 소득의 아르바이트 정도만 해야 하다니. 제도는 있으되 정작 사용하려야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는 이제 슬기로운 재활 라이프를 시작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바 일을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다. 남편은 안정적으로 수입을 벌어 오고, 우리 엄마는 첫째 유치원 등하원과 둘째의 재활 및 돌봄을, 나는 절반의 시간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나머지 절반의 시간은 첫째랑 놀아주고 둘째의 재활을 다니고, 그리고 밤에는...... 아, 밤에는...... 남편이랑 나랑 잠 안 자는 둘째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돌봐야 했다.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가? 발달장애 아이들이 보통 밤에 잠을 잘 안 잔다는 걸. 신생아 때야 원래 안 자나 보다 했지만, 돌이 지나고 두 돌이 다 되어 가도 밤마다 아이가 깨서 놀거나 소리 지르거나 울거나 하는 통에 우리는 불면의 밤들을 보냈다. (지금도 여전히 안 자는 건 매한가지지만 나름 꽤나 익숙해졌다.) 안 그래도 급박한 상황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울이 찾아오던 차에, 밤에 잠까지 못 자니 애써 부여잡은 멘탈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슬픔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렇다. 다음 이야기는 슬퍼하기 단계다. 새해에 처음으로 쓸 다음 이야기가 슬퍼하기 단계라니... 피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똑바로 마주 봐야 한다. 지나간 시간들을 기록하며 나의 감정들을 마주 보는 것은 앞으로의 내 마음을 더 단단하게 잡기 위한 선작업이다. 고통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 피하지 말고 마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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