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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Jan 08. 2021

나에게 마음껏 울 자유를 허하라.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5단계 : 충분히 슬퍼하기

“지나간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말아 줘, 엄마. 그냥 지금만 생각해. 자꾸 뒤돌아보면 나 못 살아. 내가 어떻게 살아?”


힘들었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아이는 너무 자주 아팠고 열만 나면 경련을 했다. 야물지 못한 아이의 뇌는 열에 취약해서 툭하면 파업을 했고, 우리는 응급실과 절친을 맺었으며,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호캉스(호텔 아니고 호스피탈 바캉스)를 가 있었다.

우리 부부가 둘째를 안고 동동거리는 동안 첫째는 경련하는 동생과 사색이 된 엄마의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채 할머니 할아버지와 집에 남겨져 아무렇지 않게 유치원을 다녔다.

그런 첫째를 다독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두 아이 육아에 많은 부분을 담당하시던 우리 엄마는 나로 인해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시는 것 같았고, 나는 그런 엄마에게 평생에 갚지 못할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미안하고 고마웠지만 빚진 기분이 때로는 가시 돋친 말로 살아나 별 거 아닌 엄마의 걱정에도 날 선 반응으로 대응하게 했다. 조금 더 일찍 병원에 가 봤어야 했다는 엄마의 푸념 한 조각도 나는 곱게 들어 넘기지 못하고 ‘엄마가 지난 얘기로 날 질책하면 나는 살아갈 수가 없다’며 위의 저 배은망덕한 소리를 지껄이고는 속으로 괴로워 죽는 못난 딸내미였다.


어렵게 시작한 재활치료도 힘겨웠다.

둘째는 치료 행위가 그저 낯선 사람들이 자기에게 해코지하는 걸로만 느껴졌던지 목청껏 울어 젖히는 걸로 치료를 강하게 거부했다. 집에서 홈티를 할 때도 완강히 거부하며 온몸으로 울었고 외부 치료실에 나가서도 땀으로 흥건히 젖을 때까지 울다가만 온 기억이 허다하다.

치료 거부는 낯선 환경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집에 낯선 누군가가 오면 치료사인 줄 알고 소리 높여 울었고, 낯선 공간에 데리고 가면 치료실인 줄 알고 자지러졌다. 낯가림이 전혀 없던 아이가 재활치료 시작 후 이렇게 돌변하니 정말 미치겠더라. 외식 한번 모임 한번 맘 편히 데리고 나갈 수 없었다. 아무리 안고 어르고 달래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아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와 공공장소에 있을 때의 그 낯뜨거움이란...... 아이가 안쓰러운 것도 안쓰러운 건데 우선은 내가 너무 당황스럽고 얼굴이 붉어져서 그 장소를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것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아이가 왜 이렇게 우는지, 왜 이렇게 안 달래지는지 어떻게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이었나? 둘째는 낮잠에서 깨면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두 시간 넘도록 악을 쓰고 울었다. 역시나 달래지지 않았다. 그 조그마한 몸뚱이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제 풀에 꺾여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근육에 힘이 없어서 홀로 앉지도 기지도 못하던 여린 아가가 울 때는 세상 으뜸 천하장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지칠 줄을 몰랐다.

그래도 낮에는 참을 만했다. 문제는 밤에도 울었다는 것이다. 잘 자다가도 꼭 깨서 울었다. 어느 날은 울다 놀다를 반복하며 쉬이 지나는 날이 있는가 반면, 어떤 날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소음 데시벨로 내 속에서 천불이 올라올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귀에 때려 박는 듯한 아이의 울음을 한 시간 이상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매일 계속되고 무엇을 해 줘도 안 달래질 때의 그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둘째는 엄마인 나에게 울음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 내 정신력이 바닥을 칠 때까지 떵떵거리며 울었고, 나는 급기야 우리 집이 15층인데 나 혼자 여기서 뛰어내리면 저 울음소리 안 듣고 편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 말을 엄마한테 뱉기도 했다. 못된 딸내미 같으니라고.)


정말 많이 힘들었다.

단지 내 아이가 장애를 가져서가 아니라, 당장의 현실들이 나를 괴롭혔다.

자꾸만 아픈 아이, 달래지지 않는 아이, 잠을 편히 자지 않는 아이, 그 울음소리,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불쌍한 내 인생에 대한 자기 연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첫째랑 놀아줘야 하고 일터에 나가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했다. 집에서 병원에서 늘어진 옷을 입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가도, 출근해서 (사이버 대학의) 강의 콘텐츠를 찍기 위해 전문가다운 단정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시답잖은 농담을 섞어가며 평온한 인생을 사는 사람인 양 특유의 친절이 배인 표정으로 지루하지 않은 강의 영상을 만드는 게 내 일이었다. 다른 대학에 출강을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힘든 마음 따위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하하호호 웃으며 학생들과 눈을 맞추고 에너지를 끌어모아 수업을 했다. (교육은 철저히 서비스업이고 나는 그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친절한 강의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일이 있어서 그래도 그 시간들을 버티긴 했다마는 힘들어서, 괴로워서, 슬퍼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길을 걷다가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도 느닷없이 눈물이 줄줄줄 흘러나오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즈음 나는 한동안 대중교통을 탈 수 없었다. (18년도 하반기 마스크 없이 살던 시절이었다. 눈물을 가려줄 그 무엇도 얼굴에 걸치지 않았던 그때가 다소 그립다.) 울면서 희뿌연 시야로 운전하는 것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들키는 것보단 나았다. 내가 마음껏 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그곳은 바로 내가 운전하는 차 안 뿐이었기에 홀로 출근하며 퇴근하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기도에 있는 우리 집과 서울 강북 꼭대기에 있는 학교는 편도 두 시간은 너끈히 걸렸고 나는 그만큼의 시간 동안 내 맘대로 실컷 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충분히 슬퍼할 자유.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그 힘듦과 괴로움, 슬픔을 비워 내는 일이 절실했던 것 같다.

그때 정말 그렇게 마음껏 울지 못했다면 가슴속에 쌓여가는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비워낼 수 있었을까? 그것들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차오르는 얄팍한 성질의 것이어서 주기적으로 비워 주지 않으면 언제 또 생각을, 머리를 고장 낼지 모른다. 자꾸 비워줘야 그 자리에 생각, 계획, 희망 같은 것이 자라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힘든 당신, 울어라. 충분히 울어라. 슬픈 노래를 듣든, 슬픈 영화를 보든, 아니면 그냥 자기 연민에 빠져 울든 우선은 실컷 울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겐 마음껏 울 자유가 있으니... 그 자유를 충분히 누리시기 바란다.

울고 비워내면 잠시 또 일어날 힘이 생길 테니, 지금 미치겠으면 다 덮어놓고 우선은 좀 울자. 그래도 된다고, 안 될 이유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 실컷 울었다고 지금 안 슬픈 건 아니다. 아이는 아직도 밤에 깨고, 나는 여전히 가끔은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최소한 15층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한다. 나는 살 거니까. 그것도 아주 잘, 정말 잘 살 거니까. 그래서 나는 공부하기로 했다. 발달장애 아이와 함께, 아니, 비장애 장애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지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르면 공부해서 알면 되지 뭐. 뭐가 두렵나? 까짓것 실컷 울고 났더니 알아갈,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다음 단계에서 더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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