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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빛소금 Jan 23. 2019

지상낙원이 있다면 바로 여기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첫 번째 이야기

멀고도 험한 떼제베의 길

 

 예약한 기차는 오후 1시 16분 출발 예정, 숙소에서 아침 8시 30분부터 준비 다 하고 여유 있게 낮잠까지 잤다. 몽파르나스역에 출발하기도 1시간 전에 도착했다. 출발 15분 전, 기차를 타러 승강장으로 갔다. 떼제베는 처음이라 낯설어 도무지 어디서 어떻게 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도합 다섯 사람에게 티켓을 보여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봤다. 배낭 메고 우왕좌왕하며 길을 찾아다니다가 어떤 이가 알려주어 찾아간 곳은 내 좌석이 아니었다. 이러다 기차 출발하겠다 싶어 아찔해 등골에서 땀이 주룩.

  

테제베 티켓

 다시 기차에서 내려 잽싸게 달려 역무원께 울기 일보 직전의 몰골로 티켓을 보여주며 

"제 자리 어디예요? 저 좀 도와주세요" 

하니 

"아 바욘?"

이라 되물으시고 제대로 알려주셨다.  출발 하기 1분 전인 오후 1시 15분에 제 자리 찾아서 앉았다. 천만다행이었다. 어리숙한 탓인지 원래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참. 멀고도 험한 떼제베의 길이다.


파이브 댄 자드라

 

 기차에서는 파이브라는 책도 읽고 영화 아가씨도 봤다. 창 밖 풍경을 구경하다 한 숨 눈도 붙인 뒤 목적지인 바욘 역에 도착했다. 예약한 호텔로 향했는데, 이상하게 쎄한 느낌이 들었다.

예약한 곳과 도착한 곳이 같은 곳이길 바라며 안으로 들어갔지만, 직원에게 예약한 내역을 이야기하니 예약되어 있지 않단다. 예약한 호텔의 이름은 '레투스 더 피스' 였고, 잘못간 곳의 이름은 '레투스 더 피스 호스텔'였다. 하는 수 없이 15kg이 넘는 무게에 달하는 배낭을 메고 예약한 '레투스 더 피스' 숙소를 찾아 무거운 발을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햇님께서 화가 나셨는지 살이 금방이라도 탈 것 같았으며, 배낭은 벽돌이 들어있나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악을 쓰기도 하고, 욕이 막 튀어나왔다. 

'앞으로 순례길은 어떻게 걸으려고 벌써부터 이러는지 원.' 

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레투스 더 피스' 숙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짐을 풀고 숨을 좀 고른 후에 동네를 구경하러 길을 나섰다.


노을 맛집 바욘

 

 어떤 여행지든 새로운 곳의 처음보는 광경은 늘 새롭고, 감탄스럽다. 맛집에 가도 줄을 기다리는 동안은 힘들지만, 기다린 후에 맛보는 음식이 그만큼 더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전에 고생한 힘듦이 바욘의 노을 지는 풍경과 어우러진 잔잔한 호수로 인해 불같았던 마음은 금새 평온해졌다.



하늘이 내게 준 선물, 바욘의 노을



한국인 동행이 생기다     


호스텔 조식


 호스텔 조식으로 빵과 과일, 커피, 요플레를 먹었다. 짐을 챙겨서 생장 드 피드포 행 기차를 타기 위해 바욘 역으로 갔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한국인 둘을 만났다.(민수, 민정) 한국인을 보니 몹시 반가워 혹시 한국인이냐고 말을 걸어 이야기를 나눴다. 기차를 타니 또 다른 한국인(보민)이 있었다. 서로 싸온 과일이나 간식을 함께 나눠먹고 설레는 마음들을 주고받으며 생장 드 삐드포에 도착했다.



순례자 사무소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순례길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안내 책자와 조개껍데기


 순례자 여권과 *알베르게 정보가 적힌 안내책자를 받고, 조개껍데기도 가방 한 자리에 장식했다. 조개껍데기는 순례자임을 알리는 표식이라고 한다. 사무소 직원이 지정해 준 알베르게로 갔다.


자물쇠로 꼭꼭

 문이 닫혀있어 자물쇠로 가방을 잠근 뒤 근처에 둔 후 상점으로 향했다. 상점에서 모자와 스틱 등 순례길에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우리가 묵게 될 55번 알베르게가 문 여는 시간은 오후 2시. 물건들을 구입하고 돌아가 보니 문이 열려 있었다.


나의 첫 55번 알베르게
함께먹으니 더 맛있었던 저녁


 자리에 배낭을 두고 근처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순례길에는 혼자 걸으려고 왔으나 막상 혼자 걸을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는데 감사하게도 한국인 동행들을 만나 함께하니 두려움을 덜할 수 있었다.


정민 보성 정환 보민 그리고 나


덕분에 든든했고 하루 만에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 아무래도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인들을 만나 가질 수 있는 신기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 길 첫 번째 마을_생장 드 피드 뽀

 다음날 아침 눈을 떠 씻고 서둘러 짐을 싸고 들뜨고 두근거리는 마음 가득 안고 순례길의 첫 날을 맞이했다. 새벽 5시 40분에 출발! 어젯밤 물을 채워 냉장고에 넣어 둔 물병은 깜빡하고 못 챙겼지만 괜찮다. 다른 누군가가 잘 쓰기만 한다면 말이다.


동키 서비스는 다음 마을까지 돈을 주고 배낭 등 짐을 운반해주는 서비스다


 피레네 산맥이 무지막지하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미리 동키 서비스로 배낭을 맡기고 맨 몸으로 걸었다.



점심은 파스타와 치킨을 먹었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스페인 할아버지들을 따라서 걷다 보니 본의 아니게 피레네 산맥이 아닌 평탄한 길을 걷게 됐다.


잠시 쉬었다 간 곳, 동화 속 세상 같다

 24km 걸어서 론세스바예스 마을의 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배낭까지 맡기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피레네 산맥을 걷지 않게 되다니. 아무래도 순례길 한 번 더 가라는 신의 계시인가 보다. '두 번째 순례길에서는 꼭 피레네 산맥을 경험해보리.'     



*알베르게 - 순례자 숙소를 알베르게라고 한다

*동키 서비스 - 다음 마을까지 돈을 주고 배낭 등 짐을 운반해주는 서비스



지상낙원이 있다면 바로 여기     

볶음밥처럼 생긴 빠예야

 

 알베르게 자판기에서 빠예야와 미트볼을 뽑아 민수와 보민과 함께 나눠 먹고 출발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첫날과 달리 배낭을 메고 걸으니 상상 이상으로 힘들었다. 흔히들 순례길에서 본인이 짊어진 배낭은 삶의 무게라고 하던데. 

‘나의 삶의 무게가 이렇게 고된 것인가’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걷는 속도가 현격히 줄었고 무리보다 뒤처졌다. 중간에 힘들어 쉬고 또 쉬고 벤치에 앉아 배낭을 재정비하고 걸었다.


보민과 크리스티나


 외국인 친구 크리스티나를 만나 서로 

'힘들지 않으냐, 그래도 할 수 있다' 

북돋아주며 함께 걸으니 힘이 나서 열심히 걸을 수 있었다. 보민이와 물에 발도 담그고 조금 쉬고 또 걸었다.


초록초록

민수는 내가 하도 안 와 걱정이 되어 배낭을 대신 들어줄까 생각하고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는데 본인도 힘들건데 그렇게 걱정해주고 신경 써주어서 감동이었다. 삶의 무게(나의 배낭)를 짊어지고 산 넘고 물 건너가며 힘들 때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조승우 씨가 부른 노래 '지금 이 순간'을 듣고 따라 부르며 걸었다.


Ar.. 힘들다

 가사를 개사(‘지금 이 순간, 배낭을 벗어던지고~’ 등으로)해서 불렀는데 재미도 있고 은근히 힘이 났다.


PHOTO BY 아쎈시

 마침내 수비리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새롭게 만난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민수가 만들어준 스파게티를 먹으며 여러 한국인 친구들과 담소를 나눴다. 이 날 알게 된 UU와 순례길 여정의 반 정도는 함께 걷게 됐다.




 알베르게에서 미리 준비해 준 조식을 먹은 후 조금 느긋하게 출발했다.




UU와 처음으로 함께 걷게 됐다. 조금 걷다가 시냇물이 있는  바람도 산들산들 부는  초록초록한 나무숲 그늘에서 시냇물에 손도 담그면서 쉬었는데 지상낙원이 있다면 여기인가 싶었다.

'늦게 도착해도 어때? 이렇게 좋은데?'

졸졸졸 시냇물 소리. 시원한 바람.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긴 후 다시 걸었다.



배낭이 퍽 무거워 마지막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우체국으로 꼭 필요하지 않은 짐들을 보내 한결 가벼워졌다.  



순례자 정소영의 하루 루틴     
1.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가서 씻고 짐 챙기기
2. 아침 먹고 출발(좀 늦게 일어나면 그냥 출발)
3. 걷기
4. 걷다 배고프면 바에 들러 커피나 빵 먹기
5. 다시 걷기
6. 원하는 마을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짐 풀기
7. 샤워하고 손빨래하기
8. 숙소에서 여러 활동(맥주 또는 와인 마시기, 일기 쓰기, 담소 나누기, 게임하기, 요리하기, 책 읽기 등)하고 저녁 먹고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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