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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May 05. 2022

그녀의 친구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엄마 친구 딸 친구

엄마 (68년생)

/ 딸 친구와 만나고 나면 ‘걔가 엄마 보더니 뭐래?’ 하며 민심의 동향을 신경 쓰는 타입


~ 어서 와라


어릴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가면 친구 어머니가 건네시던 인사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늘 비슷했다. 울 엄마 역시 내 친구들에게 같은 말로 인사하시곤 했다.

근데 나는 조금 다르다.


 반가워요내지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등등.


반말과 존댓말 차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딸의 친구들에게 존댓말을   아니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만난 친구에겐 쉽게 말을 놓을 수가 없다. 반말과 존댓말 구별이 없는 언어에   던지고 싶긴 하지만, 어쨌건 우리말에 반말 존댓말이 존재한다면 나이 차이를 이유로 처음 만난 성인에게 말을  놓는   내키지 않는 일이다. 물론  엄마나 친구 어머니의 반말이 불쾌한 적은 없다. 다만  경우에는 그렇다는 얘기다.


 이유를 따져보면 내가 어릴  생각하던 어른과 지금 나의 모습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  같다.  엄마는 같은 연배에선 드물게 늦게까지 직장생활을 하셨던 분인데, 그래서인지 내게 남아있는 엄마의 대표 이미지  하나는  ‘양장 차려입으신 모습이다. ‘양장  비싼 옷을 의미하진 않는다. 갖춰 입어야 하는 자리에  때에는, 깨끗이 다린 스커트나 바지에 아끼는 재킷을 꺼내 입고 구둣솔로 문지른 구두를 신으셨다는 얘기다.  엄마를 비롯해서 양장을 차려입던 어른들은,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절차부터 관공서에 드나들며 처리해야 하는 일과 김치 담그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없는 존재였다.


그에 비해 나는 어떤가. 양장을 제대로 갖춰 입는 일도 거의 없고 해마다 하는 종합소득세 신고부터 차례상  부치는 일까지  갈팡질팡 버겁기만 하다. 이러니 딸의 친구에게 처음부터 말을 놓는 포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거다.


게다가 나로 말할  같으면 인기영합형 엄마다. 딸의 친구들이 나를 구태의연하지 않고 쉽게 늙지 않는 엄마로 봐줬으면 싶다. 물론! 얄팍하다. 얄팍하기 그지없어서 스스로도 코웃음이 나지만, 꼰대라는 말이 불러오는 껄끄러운 반응을 생각하면 나의 알퍅함이 조금은 수긍가지 않는지.


딸 친구들에게 인기 영합하려니 나름 애를 써야 한다. 이름을 굉장히 못 외우는 편인데 딸 친구들의 계보를 헷갈리지 않고 잘 외워야 하고, 딸 친구가 놀러 온다고 하면 번듯한 음식을 내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하다. 딸 친구랑 마주칠 일이 생기면 은근히 옷도 신경 쓰인다. 어른스러운 양장이 아니라 젊은이 감성에도 어필할 패션이 뭘지 머리를 굴려본다.   

어차피 믿음직한 어른이 못 되는 나는 알랑거리는 어른의 길로 마음먹는다. 체신 머리 없이 뭐하는 짓이냐고? 까짓 거 체신머리 좀 없으면 어떠랴, 딸이나 그 또래한테서 인기 얻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딸 (97년생)

/ 끼리끼리는 사이언스


엄마에게는 곳곳에서 만난 친구분들이 계신데 나이를 막론하고 그분들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1. 말하는 방식이 똑같다

말의 속도, 억양, 어미의 리듬감, 상황 묘사냐 성대모사냐 등 상황에 따른 어조, 말 사이의 공백, 생각이 안 날 때 그게 뭐였지? 를 묻는 말투, 얘기를 듣던 중 웃긴 드립이 떠올라 끼어들 때의 멘트 등등. 작게는 말투부터 자주 쓰는 단어까지 닮아 있다. 100%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친구 사이 오랜 티키타카의 내공이 있어 옆에서 듣고 있으면 대화가 엄마와 엄마가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2. 그들만의 묘사법이 있다

엄마와 엄마의 친구분들 사이에 쌓인 시간들은 모든 비유와 설명에 쓰인다. 그때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된 기억을 통해 정확한 묘사를 콕 집어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별의별 영화와 연기를 예시로 들어 사무엘 잭슨을 디렉팅을 했던 타란티노 감독처럼. 비록 타란티노는 나 홀로 영화광이었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엄마와 친구분들의 추억은 간단하지만 구체적이고 단박에 와닿는 언어로 쓰인다. 그 시절 본 티브이 프로그램, 영화, 읽은 책, 음악, 유행했던 패션, 목격한 사건, 사람 모두 설명의 도구이다.


3.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걸 얘기할 때 공감도가 올라간다.

좋아하는 건 의외로 쉽게 갈린다. 옷 스타일, 집 인테리어 또는 음식 취향도 딴판이다. 대신 싫어하는 게 똑같다. 여기서 싫어함이란 흉을 보는 게 아니라 '어떤 영화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느꼈는데 대중적으로는 히트 친 작품일 때'의 싫음 같은 것이다. 남에게 말하자니 애매하게 눈치 보이는데 친구가 왜 그게 싫은지 정확히 알 때 (이 묘사에 대체로 2번이 쓰인다.) 엄마와 친구분들은 텐션이 가파르게 올라간다. 덧붙여 '내가 조금 속물 같고 꼰대처럼 말해도 내 기본값이 그렇진 않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는 상대에 대한 믿음과 안전성이 보장될 때 이야기는 활활 타오른다.


다 쓰고 보니  신기하게도 나 역시 1 2 3번에 해당한다.


나는 엄마와 말투가 똑같다. 21살까진 몰랐는데 대학 선배가 엄마를 보곤 내가 말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어머님이 너를 출아법으로 낳으신 거 아니냐고 했다. 엄마와 대화할 땐 곧잘 옛날 얘기를 한다. 무언갈 우기는 상황이 오면 나는 꼭 12살 때 엄마와 후드 집업 색깔로 싸웠던 얘기를 하고 엄마는 내 얼굴 상태를 묘사할 때 곧잘 캐릭터에 비유한다. 내가 머리가 길었을 땐 스타워즈 츄이를 자주 얘기했다. 싫음의 교차점? 마음 편하게 무언갈 흉보기 좋은 상대 1위가 엄마다. 엄마도 그럴지는 미지수지만.


어쩌면 엄마와 나는 서로의 베스트 프렌드 중 한 명 일지도 모른다.

딸은 친구 같아서 좋다더니 그게 정말인 걸까

혹은.. 내가 너무 친구가 없는 거일 지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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