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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Apr 20. 2022

얼어죽진 않아요 아이스아메리카노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얼죽아

엄마 (68년생) 

/ 한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외치는 소나무 취향

 

벌써 10년이 되었나 보다. 여름휴가를 이태리로 간 건 남편 일정에 맞추느라 8월 초 가장 더울 때였다. 사람은 너무 많았고 날은 미친 듯이 더웠다. 그런데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현지인은 보기 힘들었다. 어라? 

해외여행 경험도 많지 않았고 유럽 문화의 화려함에 잔뜩 쫄아서 모든 걸 조심스러워하는 심리가 작동했던 거 같다. 지글대는 이태리 햇살 아래 헉헉 대면서도 들이키는 건 뜨(거운) 아(메리카노)였다. 촌스러워 보이지 않겠다는 쫄보심리의 발현. 


여름휴가 후에는 그게 우쭐함으로 변했다. ‘내가 가봐서 아는데…’라고 우쭐대며 뜨아를 고집했다. 참나. 8박 9일 동안 이태리 사람을 전수 조사라도 했다는 건지. 


또  한 번의 변신은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이 어디서 들었는데, 우리 나이에 얼음 넣은 음료수는 치아 건강에 치명적이랜다. 무릎을 탁 쳤다. 

‘아하! 역시 내 취향은 현명한 선택이었어!’ 

후우~ 이러면 걷잡을 수 없다. 쫄보의 선택이 현명함으로 탈바꿈했으니 의기양양 난공불락이 돼버린 거다. 

온몸에 습기가 휘감기는 무더위에도,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르는 장마철에도, 숙취 땜에 미칠 듯이 목이 타는 날에도 무조건 뜨거운 아메리카노. 같이 일하던 후배들은 커피를 시킬 때에도 뭘 마실지 묻지 않았다. 답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근데 언제부터였을까. 요즘 젊은이들은 ‘얼죽아(얼어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란다. 딸도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은 왜 차가운 걸 찾는 걸까? 


답을 얻는 게 쉽지 않을 거 같다. 나의 ‘뜨아’ 취향에도 배경 설화가 구구절절인데 ‘얼죽아’ 도 마찬가지겠지. 누구는 뜨거운 걸 홀짝댈 만큼 한가하지 않을 수도 있고, 누구는 열불 나는 사회 때문일 수 있고, 또 누구는 그저 입맛에 맞아서 그럴 수도 있을 거다. 


문제는 “왜 넌 항상 ‘아아’야?”  혹은 “ ‘뜨아’가 맛있어요?”라고 물어놓고는 정작 그 답을 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태도 아닐지. 사람들 사이에 자리 잡은 수많은 균열은 어쩌면 그런 식의 사소한 무심함에서 시작된 건지 모른다. 스물아홉 살 나이 차이 나는 딸과 함께 글을 쓰기로 한 것도 그런 균열을 땜빵해볼까 해서다. 

이번 땜빵질이 은근한 효과를 발휘해주길 빌며, 얼죽아가 확실히 부러운 게 하나 있다. 차가워도 몸서리치지 않는 젊고 건강한 치아와 잇몸! 진정 부럽다. 






딸 (97년생) 

/ 아메리카노는 살 안 쪄 .


추운 크리스마스에 인파를 뚫고 조심조심 케이크를 사 옮기는 것은 케이크가 맛있어서가 아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따뜻하고 달콤한 분위기를 위해서다.


얼죽아도 그러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맛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로 마시는 것이다.

손끝 발끝이 꽁꽁 어는 한겨울에도 차가운 아아를 들고 돌아다니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는 맛의 경험만을 위해선 일어날 수 없는 고통스러운 행위이다.


아아의 가치는 흐릿하고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서늘함에서 나온다.

강의실, 도서관, 사무실의 텁텁하고 먼지 낀 공기가 내 머릿속에 침투했을 때

아아를 한 모금 마시면, 산골에서 폭포 수련한 듯 깨끗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고 탁한 시야가 걷힌다.

저릿한 차가움이 목구멍과 관자놀이 사이를 동시에 통과할 때 비로소 나는 유효한 노동 또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나로 태어난다.

때문에 얼죽아들은 꼭 첫 모금에 '살 것 같다..'라는 말을 뱉는 것이다.


고로 얼죽아들의 커피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로 대체될 수 없다.

핵심은 온도다.

카페인은 가슴의 두근거림을 가져올 순 있어도 맑은 정신을 불러오진 못한다.

차가움만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수억 개의 나의 크리스탈을 자극한다.

얼음을 담아놓은 뒤 샷을 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재빠른 휘젓기로 차갑게 만들어줘야 한다.

얼음을 동동 띄웠지만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는 역으로 체증을 불러일으킨다.


얼죽아는 아메리카노의 맛에 기대가 없다. 승부는 혀가 아닌 뇌에서 나는 거니깐.

그런데 얼죽아의 입에도 맛이 없는 카페가 있다? 거긴 심각한 거다. 상호 떼라.

아아는 프라푸치노나 에이드로 대체될 수도 없다.

액상과당은 아아가 주는 깔끔한 뒷맛 대신 갈증을 준다.

갈린 얼음의 짜릿함과 혈당 쇼크는 짧고 강렬하지만 그뿐이다.

특히 프라페는 마지막쯤 음료의 양과 굵은 빨대 사이의 괴리로 컵을 들어 올려 퍼먹어야 하는 성가심이 있다.

이는 맑은 정신을 짜증과 갑갑함으로 얼룩지게 한다.


아아는 신비의 명약이 아니기에 실제로 일의 능률을 높여주거나 열두 쪽 분량의 레포트를 채워주진 못한다. 

어떨 땐 잠도 깨워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산뜻한 효능감과 막연한 자신감, 살아있음을 불어넣어 주는 효과는 분명하다.

플라시보 일지라도 4000원짜리 정신계 피톤치드라면 직장인 또는 학생들에겐 이만한 가성비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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