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희주 Oct 18. 2022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혹은 망가진 호미로 밭 갈기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가사노동

엄마 (68년생)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고 싶다. 밥솥이나 세탁기 말고 거울 앞에서 토닥토닥하며. 


내 주변에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를 절대 보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 정확히는 보지 못한다고 한다. 우주에 혼자 남겨진다는 건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혀서 도저히 볼 수가 없다는 거다. 나는 엔드크레딧에 올라갈 때 한동안 멍했을 정도로 좋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홀로 집에’ 있어도 난리가 나는 판인데, ‘나 홀로 우주에’라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어쨌건  <그래비티>는 봤다. 근데 나는 <툴리>라는 영화는 못 본다. 인류 최고 아름다운 여성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샤를리즈 테론이 나오지만 볼 엄두를 못 낸다. 처음에는, 육아와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설정을 읽고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근데 우연히 스포를 당한 뒤엔 결심이 확고해졌다. 난 이 영화를 절대 안 볼 거다. 왜? 나를 너무 힘들게 할 테니까. 새록새록 내 생각이 나서 괴로울 테니까. 


나는 집안을 반짝반짝 빛내며 살아온 사람은 아니다. 손끝이 야무지지도 않고, 가족을 위한 요리에 모든 걸 쏟아부으며 보람을 느끼는 타입도 아니며, 정리정돈이 칼 같지도 않다. 내일로 미룰 수 있는 건 되도록 내일로 미루며 살았고, 지저분한 게 눈에 띄면 그쪽으로 눈을 안 돌리는 걸로 타협하며 생활한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건, 그렇게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집안일은 힘들었다는 거다. 얼마 전까지 내내 맞벌이를 했고, 친정이나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 데다가, 한때는 가사 도우미를 부르는 걸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겁이 많은 고양이들이 힘들까 봐 관뒀다. 그 와중에 아이가 어릴 땐 아토피가 심해서 음식을 배달해서 먹는 것도 어려워 부지런히 집밥을 해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남편과 아이는 풍성하지 않은 밥상을 마주해도 집밥이란 이유로 불평을 철근처럼 씹어 삼켜야 했고, 나는 가사노동의 책임자라는 완장을 셀프 착용하고 큰소리치면서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휘청댔다. 몸 여기저기 고장이 나서 잊을만하면 한 번씩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고 제일 씁쓸한 건 죄책감이다.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는 거. 


죄책감이 쌓이는 경로는 여러 가지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앉지를 못했다. 한 번 앉으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다는 걸 뻔히 알기에 옷 갈아입고 손 씻고 바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밥이 다 됐을 때쯤 퇴근해서 밥을 먹는다. 그러면 그때 실감한다. 

‘밥 먹는 뒤통수만 봐도 밉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거구나’

‘나는 일하고 와서 소파에 한 번 앉지도 못하고 밥 하느라 정신없었는데, 당신은 넥타이 풀고 쩝쩝 거리며 먹으면 다냐?’

배배 꼬여가는 내 속을 알리 없는 남편이 흐물쩍 웃으면 내 속에선 화르륵 천불이 났다. 근데 돌아서면 마음이 또 바뀐다. 

‘저 남자도 애쓰는데… 저 사람도 밥 먹고 나면 설거지하랴 쓰레기 버리랴 쉬질 못하는데…’ 

불타올랐던 미움은 미안함으로 남고, 그게 뭉치고 뭉쳐 죄책감이 된다. 


그뿐인가. 요즘은 왜 이렇게 살림 잘하고 솜씨 좋은 사람이 많은지. 

SNS만 봐도, 포털 첫 화면만 훑어도, 유튜브만 열어도,  반짝반짝 닦고 가꾼 살림에 감각적인 인테리어 센스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그에 비해 난…아~ 이놈의 못난이 집구석…주눅 들고 한심하다. 죄책감이 1 더해진다. 


속상하다. 억울하다. 왜 난 하느라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 미안함을 벗어던지지 못했는지. 슈퍼우먼 콤플렉스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직업적으로도 인정받고 집안에서도 박수받고 싶다는 욕망. 그게 나를 힘 빠지게 하고 울적하게 만든 거다. 물론 남편이나 딸이 이 글을 읽으면 ‘으잉?’ 할지 모른다. 

‘죄책감 느낀 사람치곤 너무 큰소리던데?’ 

‘우리가 먹었던 그 미적지근한 밥상이 집밥을 해먹이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 인정인정. 그렇게 보일 수 있었겠지만 나도 나름 속이 시끄러웠답니다. 고민 많았다고요. 


얼마 전 병원에서 제법 심각한 병을 진단받았다. 

근데 그걸 들은 내 반응은 스스로도 의외였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딸이 이 정도 커서 다행이다. 아이가 어렸다면 엄마 아픈 걸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 두 번째는 ‘휴- 이제 난 면제구나!’ 하는 안도감. 이젠 쓸고 닦고 지지고 볶는 일에 신경 꺼도 되겠지 하는 후련함. 

나 편한 거 생각하고 나 좋은 것만 생각해도 되는 티켓을 뽑았다는 은근한 즐거움마저 들었다. 덕분에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가사노동에 대한 부담이 꽤 컸다는 걸. 


그런 의미에서, 집 안팎으로 오가며 동동거리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자신이 다한 최선을 스스로 칭찬해주자고. SNS에 등장하는 기막힌 살림 솜씨에 주눅 들거나 따라 하려다 스트레스받지 말자고. 


당신의 주부습진에 치얼스!



딸 (97년생)

/ 어쨌든 집안일은 귀찮다.


기름과 고춧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그릇을 뽀득뽀득 닦아 테트리스 쌓기. 젖은 채로 구겨진 옷들을 판판히 펼쳐 빨랫대에 널기. 머리카락이 뱀처럼 드글거리는 방바닥을 홈쇼핑 광고처럼 청소기로 속 시원히 밀어버리기. 마음을 먹기까지 심각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벌여야 하지만 하고 있으면 할 만한 일. 유튜브에 마음의 평안을 주는 영상들처럼 끝나면 만족스러운 일. 나에게 집안일은 그러하다. 개 중에도 요리, 설거지, 빨래가 그렇다. 그럼에도 싫어하는 일들도 있다. 집안 대청소,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고양이 털 돌돌이로 떼어내기.

좋아한다고 귀찮지 않은 건 아니다. 싫어한다고 보람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다. 집안일의 디폴트 값은 비슷비슷하다.


가사노동은 ‘노동’이다. 땀 흘리는 기쁨과 보람, 존재 가치 증명, 과장 조금 보태서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 있는 행위 등등. 노동은 삶을 대내외적으로 굴러가게 한다. 앞서 말한 게 내적 요소라면 외적으로는 경제수단이 되어준다. 가사노동의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여타 노동들과 달리 행위의 가치가 경제적으로 환산이 되지 않는 것. 이건 입주 가정부나 청소노동자의 급여와는 다른 얘기이다.

사적인 가사노동은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뤄진다. 자식의 지저분한 방을 본 부모님이 여기가 돼지우리냐고 괜히 묻는 게 아니다. 지저분해도 사는데 문제없는데 왜 치워야 하나? 사람 사는 집이니깐.

가사노동은 사적이기 때문에 누구도 지불하지 않는다. 내가 나한테 월급을 줄 수도 없고 가족끼리 주휴수당 따지며 계산기 두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깐. 2022년 자본주의 대한민국. 지불되지 않는 행위는 경제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탈락된다. 액상세제 2+1, 다이소의 2000원짜리 보풀제거기 같은 가사노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비는 중요해도 행위 자체에 대해선 경제적 관심이 떨어진다. 누구도 가사노동이 몰가치하다고 말하진 않지만 우리의 인식 속에 이 노동의 기준가치는 부재한다. 셀 수 없이 종류가 많고, 당위적이고, 매일매일 하는 강도 높은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깨끗이 널린 빨래들을 보면 뿌듯하고 마음이 안정된다는 걸 알면서도 꾀가 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세상 일은 마음만으로 하기는 어렵다. 월급을 바라진 않지만 매일 거기에 들이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대가를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의무밖에 없으니 자꾸 후순위로 밀게 된다.


거기에 여성 중심 노동이라는 사실 역시 가치 찾기를 미궁으로 빠트린다. 시대가 변했고 우리 집의 가사 분담 역시 이제는 잘 이루어진 편이지만 이건 오랜 세월 동안 지난하게 살아온 엄마의 공로다. 사회에는 아직 구시대의 인식이 남아있다. 그래서 가사노동을 생각하면 기분이 분하다. 앞서 노동은 존재 가치 증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재능 넘치는 여성들이 여전히 성실성으로만 인정받는 게 싫다.


평생을 가사에 힘쓰신 나의 할머니는 식물을 키워내는데 초능력이 있다. 영등포 모처의 옥상에서 호박을 길러 호박잎쌈 해드시고 열무를 길러 비빔밥을 해드신다. 할머니는 차분하고 꼼꼼해서 무엇이든 묵묵히, 끝까지 해내신다. 관찰력도 좋아 우리집에 오실 때면 고양이가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도 알아 보신다. 그래서 할머니의 지난 시간이 가끔씩 아쉽다. 때 되면 넙죽 식혜 받아먹는 손녀가 하기엔 조금은 기만적인 말이지만 마음이 그렇다. 기름진 음식부터 오손도손 모여 앉는 가족들까지 나는 명절의 모든 걸 좋아하지만 얼른 오길 고대하진 않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빠 구두 닦으면 500원. 심부름하고 남은 잔돈 300원. 소소한 동전들을 챙기던 시절엔 의욕이 넘쳤다. 어린이가 어른들이 하는 걸 따라 해서 좋아했던 것도 있겠지만, 칭찬의 말과 동전 몇 개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했던 거다. 누군가는 알바에 가고 직장에 출근을 할 동안 집에서 치우고 닦고 정리하는 일들 역시 ‘일’이라는 걸 우리는 더 확실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치에 적절한 합의점이 도달했을 때 가사노동은 노동으로서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의욕이 생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상단사진 출처 : Freepik

이전 04화 그녀의 친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