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취미
/ 무용한 몰두를 아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어쩌다 대형서점에 갈 일이 있으면 빼먹지 않는 코스가 있다. 문구점.
그중엔 꼭 한 번씩 들르는 코너. 바로 다양한 노트들이 ‘어서 오세요’하고 누워있는 매대이다.
펼쳤을 때 노트 양면이 쿨하게 촤악 펼쳐지거나,
마음에 드는 엷은 색의 선이 살포시 그어져 있거나,
아예 선이 안 그어져 있거나,
종이가 약간 두께가 있으면서 리넨 천 같은 질감이 느껴지는 노트를 보면, 나는 강렬한 유혹을 느낀다.
‘아 얘를 당장 업어가고 싶다!’ 하지만 잠시 후엔 노트를 내려놓으라는 엄중한 명령이 정수리 뒤쪽에서 울려 퍼진다. ‘관둬. 어차피 사봤자 앞에 몇 장 쓰다 말잖아’ 짜증나게스리 맞는 말이다.
어떨 땐 방송원고에 써먹을 아이디어를, 어떨 땐 가슴을 후려친 영화 대사들을, 또 어떨 땐 일기를 쓰겠다며 야심 차게 노트를 펼쳤다가 4분 1 지점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인간, 그게 바로 나다. 호모 흐지부지쿠스.
나의 호모 흐지부지쿠스 면모는 노트에 그치지 않고 여러 품목이 있지만 그중 가장 아픈 손가락은 ‘그림 그리기’이다.
어릴 때부터 그리는 걸 좋아했다. 이건 일종의 집안 내력이다. 친정아버지가 그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하셨고 (집안 형편 때문에 계속 미술을 하실 순 없었지만) 언니는 서양화 전공, 남동생은 미술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남다른 그림 솜씨로 주변을 놀라게 했었다. 그럼 나는? 못 그리진 않았다.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이 교실 뒤편에 가끔 걸리는 수준? 교내 미술대회가 열리면 장려상 정도? 그나마 고등학교 때부터는 미대를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밀려 거의 못 탔던 거 같다. 고등학교를 끝으로 내 인생의 정식 미술 수업은 끝났지만,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엔 먼지를 뒤집어쓴 비석이 푹 박혀있다. 그 비석에 상형문자처럼 새겨진 한마디. 그. 려. 라. (아~ 이 말에 에코를 확 먹여야 되는데!)
그리하여 난, 쓰다만 노트에 이어, 쓰다만 스케치북도 있다는 고백을 한다.
4절지, 8절지, 일반 노트만 한 사이즈의 크로키 북도 있다. 물론 어떤 것도 절반을 채우진 못했다. 아 맞다. 아이패드도 있다. 작년 이맘때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딸이 넷플릭스라도 보라고 자신의 아이패드를 챙겨줬는데 거기에 그림 그리는 앱이 있었다.
그려보니 굉장히 재밌었다. 실수로 삐져나간 선은 삭제하면 그만이고, 나 같은 아마추어가 붓으로 구현하기는 어려운 기법을 구사할 수도 있으니 신이 날수밖에. ‘이러다 호크니처럼 그리는 거 아냐?’ 헛소리도 해가며 지루한 병원 생활을 견뎠다. 뿐인가. 퇴원한 직후에도 딸을 불러 ‘아이패드 비번 걸지 마. 엄마 거기에 그림 그릴 거다’ 큰소리쳤건만...... 역시 이번에도……몸에 있던 병과 함께 그리는 의욕도 사라져 버렸나 보다……
취미 :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
네이버 어학사전에 나온 취미의 정의다.
즐기기 위한 것이고 감흥을 느껴 마음이 당기는 게 취미인데, 왜 나는 취미를 생각하면 부채감부터 느껴질까. 왜 죄책감이 생기지?
스케치북이나 물감 등을 사놓고 방치한 것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나 자신을 방치했다는 느낌.
지금은 일을 해야 하니까. 내일은 집안 청소를 해야 하니까. 주말엔 남편과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나의 즐거움과 감흥은 자꾸 이렇게 뒤로 밀린다. 처음엔 후순위로 밀렸는데 나중엔 풀이 죽어 앞으로 나올 생각도 안 한다. 에이 그려서 뭐해~ 에이 써서 뭐해~
쓸쓸하고 외롭게 시들어가는 '내 마음이 당기는 멋'. 울컥.
이 나이에야 감을 잡은 깨달음 중에 하나는 ‘이다음’은 없다는 거다.
이다음에 시간 나면, 이다음에 형편 되면 해야지 했던 일 중에, 정작 이다음이 됐을 때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다음은 왔어도 열정은 가버렸으니까.
열정은 자연 발화가 안된다. 올림픽 성화처럼 혹은 집안의 불씨처럼 눈 크게 뜨고 지키고 땔감을 집어넣어 줘야만 유지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에라도 얼른 스케치북을 꺼내야 할 텐데. 아이패드를 켜야 할 텐데.
/ 락에는.. 인생이 있어.
중2에게 락(rock)은 위험하다.
2011년,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당시 엄마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던 모 밴드가 록 페스티벌에 나가게 되어 엄마에게도 입장권을 나눠줬다. 그린플러그드 페스티벌의 주최지였던 난지 한강공원은 일산인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 엄마는 나를 그곳에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밴드 라이브의 참맛을.
기타 소리에 찢어지는 스피커. 둥둥거리는 심장. 화창한 햇빛 아래 땀 흘리며 부대끼는 사람들. 폭발하는 열기와 (실제로 더웠다)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보컬의 목.
정말이지 록 페스티벌은 15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밴드 음악을 열심히 듣자 같은 반에 있던 락덕 친구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 친구는 꼭 방황하는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얼굴이 하얗고 까만 숏컷을 한 여자애였다. 우리는 미키마우스 mp3로 갤럭시 익스프레스도 듣고 칵스도 듣고 그린데이도 들었다. 원조 락덕이었던 엄마는 딸의 일탈(?) 소식에 기뻐하며 칵스의 콘서트 표도 구해줬다. 콘서트도 걔랑 갔다. 칵스 멤버가 좋아한다던 돈가스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냥 그랬다.) 멤버가 자주 쇼핑한다던 옷가게를 구경했다. (난해했다.) 불이 나면 모두가 타 죽을 거 같은 홍대 지하의 공연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날뛰었다. 음악은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맞나 봐!
그 친구는 드럼을 쳤다. 친구의 오빠는 기타 친다고 고등학교를 자퇴했다고 했다.
아.. 모든 게 청춘 밴드 만화의 일부분 같았다. 어쩐지 나도 그 만화 속 캐릭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망상이 너무 가까웠다. 그래서 일렉기타를 샀다.
이전에는 피아노를 쳤었다. 5살부터 12살까지. 흰 종이에 건반 그려 뚱땅거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부모님이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만 둘 때는 은혜도 모르고 그만 치고 싶다고 눈물을 엉엉 흘렸다. 어린 천재의 비극적 삶처럼 울었지만 사실 초등학생의 싫증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 거였고 이번엔 백 프로 내 의지로 하는 거니까 다를 거야. 락덕 엄마는 딸의 일렉기타 로망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기타도 학원도 막힘없는 결제였다. 피아노를 판지 3년 만의 일이었다.
일렉기타 두 번째 수업쯤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던 다른 학생 얘기를 했다. 전교 1등에 서울대를 지망하는 고등학생. 고삼임에도 기타 연습도 성실히 해 볼 때마다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있다고 했다. 서울대 갈 애는 역시 다르다 뭘 해도 될 놈이다 어쩌고 저쩌고.
입시의 매서움을 몰랐던 나는 서울대 까짓 거 갈 수도 있지 중학생한테 별말을 다하시네 하고 코웃음 쳤지만, 실로 선생님이 맞았다.
피아노를 시작했던 5살 땐 아무것도 몰라 학원에 가라면 가고 치라면 치고 외우라면 외웠다. 테크닉적 성장에 큰 문제가 없었다. 반면 머리가 큰 15살은 자꾸만 꾀가 났다. 손가락은 아프고 튜닝은 귀찮고 외워야 할 코드는 많고. 일단 시작하면 한 달 만에 피크 입에 물고 솔로 리프를 뜯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4 non blondes의 what’s up도 더듬더듬 따라갔다. (극초보 연주곡이다)
이렇다 할 진척이 없으니 (당연하다. 연습을 귀찮아했다.) 재미가 없었다. 모든 취미라는 게 원래 그렇다. 겉으로 보이는 그럴 싸한 탈에 반해 시작하지만 일정 수준의 숙련도가 붙기 전까진 재미가 없다. 그걸 모르고 입만 툴툴 거리며 쉽게 질려했다. 그렇게 기타는 내 방 애물단지가 되었다.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직도 내 머릿속의 나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can’t stop을 끝내주게 연주한다. 공연을 하진 않더라도 언어 외에 나를 표현할 무언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역시 삶의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선 인내력과 성실함이 1번이다.
기타는 미련이다. 언젠가 할 거야. 언젠가 칠 거야. 무수한 말들이 기타 가방 위로 먼지들과 함께 쌓여있다.
또한 나의 하다 만 취미는 부모님의 믿음의 증거이자 배신의 상처이다.
엄마아빠!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