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햄버거
사랑은 언제나,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느닷없이 나타난다. 비가 스미듯 스며들기도 하고, 교통사고처럼 모든 걸 전복시키기도 하고, 초라한 시골밥집에서 최고의 맛을 발견하듯 뜻밖의 모습에 빠져들기도 한다. 버거킹이 그랬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와 사랑에 빠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버거킹을 처음 만난 건 시네21에서 진행하는 시나리오 워크숍에서였다. 버거킹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직원으로 나는 시나리오 워크숍에 참여하는 학생으로. 곰돌이 푸우의 성인 버전이라 생각될 정도로 버거킹은 몸집 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배가 나오고 뚱뚱했다.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팔걸이에 팔을 얹듯 배에 팔을 얹고 있는 모습이 몹시 편안해 보일정도였다. 솔직히 첫 인상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워크숍 첫날. 뒷풀이 장소에서 우린 밤새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아하는 영화에서부터, 재미있는 영화 뒷이야기, 그리고 그가 동참했던 영화 이야기까지. 마치 동성 친구와 이야기하듯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남자와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만큼 그는 내가 알던 설명조의 남자들과 결이 달랐다. 해가 뜨는 걸 보고서야 우린 헤어졌다.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그는 직원이고 나는 학생이니까. 다시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문자가 왔다. 영화를 보자고. 전날 유쾌한 기분이 남은 탓인지 아니면 술이 깨지 않은 탓인지 난 순순히 좋다고 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괜히 나왔다고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본 남자와 깜깜한 영화관에 앉아 있으니 어찌나 어색한지. 숨소리조차 신경 쓰였다. 맞다. 뒷풀이 장소에선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이었지만, 영화관에선 남자와의 만남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여 영화 보는 내내 빨리 끝나기를 기도했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도 끝.
영화가 끝나자 그는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냥 갈까, 고민하다 공짜로 영화 본 게 마음에 걸려 커피 값은 내가 내기로 했다. 물론 후회했다. 커피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버거킹은 어제 밤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어제는 영화를 좋아하는 동료였지만 오늘은 여자를 꼬셔보려는 남자였다.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으니 어찌나 지루하고 어색한지. 난 도망칠 방법만 찾았다. 그런데 갑자기 버거킹이 말했다.
“전 버거킹 햄버거를 좋아해요.”
무슨 맥락에서 햄버거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햄버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황한 건 나였다.
“잠깐만요. 무슨 햄버거를 좋아한다고요?”
“버거킹 햄버거요. 일주일 내내 버거킹 햄버거만 먹을 수도 있어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사라지고 그의 소리만 온전하게 들렸다. 동시에 내 온 몸의 세포들이 깨어나 소리를 질렀다.
야호!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이 네 사람이라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난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모 과학자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뇌의 12개의 영역에서 도파민과 옥시토신, 아드레날린, 바소프레신 같은 희열감을 자아내는 화학물질이 방출되는 것인데 이 화학물질이 방출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0.2초밖에 안 된다고 했다.
0.2초의 마법. 그 마법 같은 시간 동안 누군가는 종소리를 듣고, 누군가는 후광을 보는데, 나는 온 몸의 세포들이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온 몸이 전율했다.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니 처음 느끼는 경험이었고,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혹자는 물었다. 버거킹 햄버거 정도에 빠질 정도로 주위에 남자가 없었냐고.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남자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있어도 몰랐을 것이다. 버거킹 햄버거 정도에 빠진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단 난 햄버거를 먹지 않는다. 아니 햄버거를 먹지 못 한다. 햄버거를 먹은 날은 꼭 체해 며칠을 고생하는 체질이었다. 그런 내가 유일하게 먹는 햄버거가 버거킹 햄버거였다. 그런데 버거킹 햄버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내가 아는 남자들은 주는 대로 먹는다. 무슨 햄버거를 좋아한다는 등, 어디 햄버거가 제일 맛있다는 등 개인적인 취향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버거킹은 자신이 좋아하는 햄버거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왜 좋아하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지 정확히 아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빠지는 건 당연했다. 그의 뚱뚱한 외모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 위로 살짝 보이는 그의 송곳니를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은 합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불합리한 것들 속의 선택이었다.
이후 우리의 데이트는 먹는 것으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먹는 걸 너무 좋아했다. 못 먹는 게 없었다. 하여 그와의 데이트는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특히 내장. 흐물거리는 내장은 내 혐오식품 중의 하나였다. 그런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며 곱창집에 데려갔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난 사랑에 빠졌고, 그가 구워준 소곱창과도 사랑에 빠졌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 한 고소한 맛이었다. 내가 먹어본 고기 중에 단연코 최고였다.
징그러워 입도 대지 않았던 꼼장어를 즐기게 되고, 도넛이라면 치를 떨던 내가 ‘크리스피크림’을 먹으면서 신을 찬양하고, 주말이면 광장시장을 헤매며 빈대떡이며 마약 김밥이며 순대를 먹었다. 해물이 먹고 싶다며 부산으로 떠난 날은 하루 다섯 끼를 먹었다. 그때 먹었던 대구탕이며 복지리, 동례파전 등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당시만 해도 정량보다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면 꼭 체했던 내가 버거킹과 먹으면 이상하게 체하지 않았다.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 나의 부주의와 부족함으로 버거킹을 떠나보내고, 버거킹과 함께 먹었던 음식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가끔 찬바람 부는 가을이면 버거킹이 생각난다. 아니 버거킹과 먹었던 음식들이 생생히 기억난다.
p.s
사랑은 가고.. 그와 함께 했던 음식만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