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에 실패한 교사의 변명
혁신에 실패한 교사의 변명
무상급식 논쟁과 함께 교육감이 선출직이 되면서 교육에도 정치적 이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육은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무상급식, 무상교육, 학생 인권, 혁신 교육의 키워드를 가진 진보와 교권과 학습권을 주장한 보수로 나뉘었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지지하는 교육도 달라졌다.
교육에 있어서는 보수보다는 진보의 힘이 컸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을 시작으로 그 영향력은 다른 지역으로도 점점 커졌다.
새로운 교육은 시대적 사명처럼 비쳤고, 이전 시대의 교육은 구닥다리이며 혁신의 과제로 인식되었다.
10여 년의 혁신 교육의 결과 우리 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생활교육이 실종되었다. 지각을 해도, 교복을 안 입어도, 담배를 피고, 수업을 들어오지 않아도 엄밀히 말하면 혼을 낼 수 없다.
교사는 학생을 ‘인정’해 주어야 하고, ‘이해’해 주어야 하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존재인데, 이런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를 기분 나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칙이 합의되어도 이것을 강제할 권한이 없다.
생활교육의 처벌권은 교사에게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학생 자치는 아직 미숙하다. 이전보다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에 어떤 학부모님들은 왜 학생들을 ‘강력하게’ 지도하지 않는지 묻는다.
교복을 만들어 놓고 왜 안 입어도 되게 하는지, 왜 지각이나 수업을 방해하거나 비행을 일삼는 학생들을 제재하지 않는지 묻는다.
하지만 학교는 이제 그러한 수단을 잃어버렸다. 물론 이러한 수단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선도위원회’라는 회의를 통해 이런 학생들에게 알맞은 징계를 줄 수 있지만, 이러한 징계는 즉시성이 떨어진다.
선도위원회를 열기 위해서는 사전 조사가 필요하고, 상담이 필요하고, 관련 위원이 모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 사전 결재가 필요하고, 회의 후에 결과 결재가 필요하다. 이러한 복잡한 절차를 가진 선도위원회를 자주 열 수가 없다.
하지만 학생들의 지각, 복장규정, 풍기물란, 수업 방해 등은 하루 동안 빈번히 일어난다. 선도위원회가 열려도 사소한 것의 처벌은 교내 봉사가 다이다.
교내봉사를 시켜본 교사는 이런 학생을 교내봉사 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결국 벌은 학생이 받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교사가 받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사소한 교칙 위반 행위를 교사의 체벌보다 더 효과적으로 단시간에 제압할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교사는 학생을 예전처럼 지도할 수 없다.
어떤 교사는 무시하고, 어떤 교사는 읍소하고, 어떤 교사는 혼을 내보지만, 그 혼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학생을 제재할 수단이 없는 교사는 무기력해지며, 규칙을 따르는 학생들은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또, 어떤 학교에서 강력하게 학생을 지도하면 그것에 반대하는 학부모님의 민원 역시 거세다. 불편한 교복을 왜 입어야 하냐, 교사가 우리 아이만 혼 낸다, 아동 학대를 받았다 같은 민원이다. 모든 가정의 학부모님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자신의 아이에게 맞는 학교가 되기를 바란다.
비교적 규칙을 잘 지키고, 모범생에 가까운 자녀를 가진 학부모님들은 교칙을 엄격히 지키고 교권과 학습권이 보장된 학교를 바란다. 그러나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니면 매우 자유로운 학생의 학부모님은 다르다. 이런 학부모님은 학생이 학교에 늘 가기 싫어하기 때문에 학교가 학생에게 자애롭기를 바란다.
요즘은 어떤 부모님도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혼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두가 스스로 규칙을 잘 지키는 학교가 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사회에서 범법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도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학교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과정이 모두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을 받는다. 여기서 교육이란 사랑과 자애, 이해와 상담으로 학생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교육을 통해 학생은 스스로 반성하고 주도적 판단으로 자기 행동을 교정한다고 교육학은 말한다. 그리고 그 결과 학생의 인격이 성장한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1년, 2년의 문제가 아니다. 또 학생 행동의 교화는 학생 개인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행 같은 학생의 문제는 가정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국에는 가정이 변해야만 학생의 변화가 일어나고 유지된다.
한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한 학생의 행동 교정은 그 학생이 속한 가정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을과 사회가 변해야 한다.
그럼, 새로운 학교가 학생의 생활 규범 지도를 학생 자치에 넘기고, 그 역할을 대폭 축소한 것만큼 수업(배움) 혁신은 이루어졌을까?
앞서 말했듯이 혁신 교육은 학생의 배치부터 수업 방식까지 협동 학습과 토론 학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전의 학습이 지식이나 기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면, 배움의 공동체에서의 학습은 표현하고 공유하는 활동이다. 그렇기에 배움은 교사의 일방적인 설명이 아니라 상호 간의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교사는 수업 디자인을 통해 학생들이 배움을 발견하도록 한다. 수업 시간에는 교사의 발화는 제한되고 학생들이 서로 탐구하도록 조율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대신 수업이 시작되기 전 수업 연구에 교사의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
또, 이 수업에서 일어나는 상호 간의 대화라는 것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같은 방식으로 가르쳐도 학급마다, 학생마다 반응과 표현, 즉 배움이 다르게 나타난다.
혁신 초등학교의 경우, 이런 수업이 학생들의 표현능력과 사고능력, 협동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중·고등학교의 경우에는 다르다.
중학교부터 학생들은 5지선다형과 서술형의 시험을 치르게 되고, 이는 등급으로 평가 결과가 표시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 결과는 고등학교 입학으로 이어지고, 고등학교에는 대학교 입학이라는 당면한 과제가 있다.
교육이라는 단어가 가진 본래의 뜻처럼, 인격의 도야,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성인이 갖추어야 하는 소양을 기르기 위한 것만이라고 생각하는 학생과 학부모를 대한민국에서 찾기 어렵다.
사회가 변하면서 ‘졸업장’의 위용은 약해졌지만, 그 필요성은 여전히 크다. 다만, 예전에는 졸업장만 있으면 되었다면, 이제는 졸업장도 있어야 하는 시대일 뿐이다.
가정이든 학교든, 교육의 성패는 대학 입시의 결과이다. 대학교 입시를 잘 보내면 그 고등학교의 위상은 올라간다. 자녀가 대학에 잘 들어가면 부모는 칭찬받는다. 그래서 학생 간의 경쟁뿐 아니라, 학교 간의 경쟁, 부모 간의 경쟁이 된다. 흔히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정의 당위성은 결과로 입증된다. 그렇기에 결국은 혁신학교의 성공도 고등학교 입시 결과로 증명되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혁신학교의 학생 자치와 수업 방법 개선이라는 특징은 생기부에 적히는 개인의 스펙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혁신학교를 피하는 이유 역시 혁신학교 출신은 학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므로 대입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협동 학습과 토의 수업을 하게 되면 주입식, 암기식, 문제풀이식 수업을 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주입식, 암기식, 문제풀이식 만큼 많은 내용을 학생에게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대입이 중요한 학생들은 비(非)혁신학교로 모이고, 혁신학교에는 기존의 학교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이 모여 더욱 학교 간의 간극이 커졌다.
경기도에서는 특히나 ‘모든 학교의 혁신 학교화(이른바 혁신공감학교)’를 추구했다. 모든 학교에서 혁신학교 식의 학교 경영과 수업 방식이 일제히 적용되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질적 성장을 방해했다. 경기도의 교사는 혁신을 흉내내면서 수업 방식의 일부를 보여주기 식으로 바꾸었지만, 결국 수업 내용과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혁신 교육이라고 부르는 이 새로운 교육의 성공은 사실 대입이 아니라 학생의 자율성의 확대(학생 자치의 확립)이고, 새로운 배움의 발견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 받았던 억압의 반작용으로 학부모의 지지 아래 학생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그것이 자치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교권은 추락하고 생활지도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배움은 기존 교육의 틀, 즉 대입이라는 벽을 깨지 못했고 대입에 필요한 신선한 스펙 중 하나가 되었다. 이전의 세대는 체벌을 앞세운 훈육과 줄세우기 식의 기존 교육에 대한 반기로 혁신교육을 지지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혁신 교육에 대한 자성과 반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과거로의 회귀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이 요즘 말하는 ‘참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 시대가 말하는 참교육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참교육을 당하는 자가 받는 피해를 즉시 볼 수 있다. 이것은 참교육을 지켜보는 사람의 쾌감이 된다. 질서와 규칙, 안전의 파괴자가 눈앞에서 당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어쩌면 우리의 인식은 나에게 장난친 친구가 교사에게 혼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이르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미셸 푸코는 학교를 군대, 병원, 교도소와 함께 근대적 훈육 장치 중 하나로 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개인은 훈육과 감시, 자기 감시를 경험하며,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배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교육은 오랜 시간 동안 훈육과 감시 기술로 작동하며, 비정상을 정상으로 길들이기 위한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훈육과 감시의 교육이 실종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대체할 것을 찾게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그 역할을 개인 스스로 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참교육이다. 참교육이라는 말이 때로 감정적이거나 직접적인 폭력이나 공개 망신과 연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볼드 처리한 부분은 각주표시입니다.
각주 52) 상벌점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경기도에서는 상벌점제 역시 학생 인권에 반한다며 암묵적으로 폐지했다. 금지 조항은 2021년 11월에 신설되었으나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보수 교육감이 오면서 2023년에 상벌점제가 부활했다고 한다.
각주 53) 스펙은 한국 사회에서 주로 취업이나 진학을 위해 개인이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이력과 자격을 의미한다. 영어 ‘specification(사양, 세부사항)’에서 유래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항목을 포괄하는 속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