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과 가짜 교육의 사이에서
참교육과 가짜 교육의 사이에서
‘영원한 건 절대 없어.’ 지 드래곤의 ‘삐딱하게’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언어 역시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어도 변한다는 것이 언어의 역사성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맞춤법이 달라지기도 하고, 소리 같은 언어 형식의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형식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의미가 확대, 축소, 이동되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의 역사성이란 사회성을 전제로 일어난다. 언어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약속)이기 때문에 개인이 함부로 바꿀 수는 없지만 개인‘들’의 합의가 일어나 약속이 바뀌게 되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주변의 그 누구도 ‘자장면’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자장면’이 표준어였고, ‘짜장면’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배웠다. 이른바 좀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아나운서 정도만 ‘자장면’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위화감을 느꼈다. 그러나 드디어 2011년에 들어 국립언어원에서 ‘자장면’과 ‘짜장면’의 복수 표현을 허용하면서 지겨운 ‘자장’, ‘짜장‘ 논쟁은 끝이 났다.
또,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일본 식민 지배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한 언어 순화 교육을 강조했다. ‘바께스’, ‘난닝구’, ‘쓰레빠’, ‘쓰메끼리’, ‘사라’, ‘와리바시’ 같은 일본어들은 식민 지배 이후에도 계속 남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식적인 교육을 통해 현재에는 순화된 말이 빼앗겼던 자리를 되찾았다.
이런 것처럼 ‘교육’이라고 불리는 것의 의미도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언어는 변하지만, 사람이 그 변화를 수용하는 속도는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빠르고, 어떤 사람에게는 느리다. 또 사회적 합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만장일치는 아니다.
사실상 만장일치라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理想)이다. 그러기에 민주주의는 항상 다수결의 원칙에 기반한다. 그런데 이제 이 다수결이 90:10, 80:20이 아니라 49:51의 사이에서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코로나 전, 지난 10년은 진보(혁신) 교육의 시대였다.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것이 과제였고, 그중에 최우선은 학생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이런 교육을 부르짖었지만, 원하는 교육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돌고 돌아 결국은 원하는 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었다.
‘행복’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배움’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배움을 시험과 진학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높은 시험성적과 진학이 행복한 삶을 만든다고 믿는다.
학생들은 이전의 학생에 비해 자유를 얻었지만, 어찌 보면 방치되기도 하였다. 경기도를 기준으로 학생들은 9시에 등교하고,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지 않고,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그 반작용을 생각하지 않았다.
기대대로라면 학생은 정규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자율적으로 규칙을 준수하며, 방과 후에는 자신의 진로를 위한 활동과 여가를 즐겨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수업을 잘 듣지 않는 학생을 제재할 방법을 잃어버린 학교는 수업 진행이 어려워졌고, 생활지도는 실종되었으며, 학생들은 사교육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 중간층이 급격하게 붕괴하였고, 기초학력미달 학생이 증가했다.
새로운 배움이 강조되면서 입시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게 되었고, 교사는 수업 내용 연구보다는 수업 방법 연구에 매달렸다. 학생 부담 경감을 위해 교육과정의 수준과 내용은 점차 축소되었지만,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더 어려워졌다.
그토록 원하고 부르짖었던 새로운 교육은 언제나처럼 성공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러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되는지도 모른다. 교육제도는 언제나 문제였으며 늘 개혁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만족하는 교육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교육을 혁신하겠답시고 10여 년 동안 교사를 들들 볶은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인가 회의가 든다. 사람들의 입에서 지금의 ‘참교육’을 운운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그 결과라니 힘이 쭉 빠진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허탈감에 자기반성이나 비하에 빠진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절대 없듯이, 완전한 것 역시 절대 없다. 혁신은 과거의 방식이 혁신의 대상이 되어야 성립한다. 그러기에 혁신 교육 역시 계속된다. 다만 이제는 그 혁신의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전에는 혁신의 대상이 권위적인 일제식 수업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생활지도였다면, 이제는 그것을 잃어버린 학교의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지만 벗어나지 못한,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한 이전 방법의 부활일지도 모른다. 헤겔의 정반합 개념처럼 이전의 시대가 반(反)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합(合)의 시대가 오는 걸까?
흔히들 역사는 진보의 일방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진보와 퇴보의 반복으로 역사는 나아간다. 이전의 참교육이 이제는 가짜 교육이 되고, 이전의 가짜 교육이 참교육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3년 간의 혁신학교 근무, 그리고 혁신공감학교로 이어지는 약 10년간의 경기도 혁신 교육 아래에서, 배움의 공동체를 실제로 운영하는 학교를 방문하고 수업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배움에 감동했다. 그것이 정답이며 우리 교육의 미래가 혁신 교육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혁신 교육에 감동한 만큼, 그만큼 지독한 무력감이 남았다. 혁신 교육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연수에서 말하는 장밋빛 미래를 그대로 받아들인 내가 순진했다.
그 순진한 믿음이 흔들리는 지금, 나는 조금 더 성숙한 걸까, 아니면 패배감에 냉소적으로 변한 걸까?
하지만 이전의 실패를 영양분 삼아 새로운 교육이 생길 것이다. 인권조례가 나오고 천지가 개벽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처럼, 계속 무엇인가 하다 보면 새로운 교육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사는, 학교는 참교육과 가짜 교육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실패를 따끔하게 맛본 나는, 한동안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하루하루 눈앞에 업무를 쫓으며 바쁘게 살면 좋은 교사인 거라고 자조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물스물 올라온다.
이게 교육인가. 이게 괜찮은가.
나는 어디까지 와 있고, 어디까지 버텨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못 찾으면 또 어떤가. 이런 의문을 품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답 비슷한 거라도 찾을 수 있겠지. 그때까지 나는 아직 교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거 아닐까?
2024.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