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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Jul 19. 2021

아니 근데. 그럼 나는 누가 지켜.

클라이언트의 무례함을 마주할 때 요긴하게 쓰는 찌질한 나만의 주술

간혹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황당한 요구를 하며 꼭 나를 대감집 일 봐주는 사람 대하는 말투로 말하는 클라이언트(들)를 만나곤 한다. 처음엔 너무나 당당하게 무례함을 선사하는 그들 앞에서 오직 말문을 막은 채 벙찌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꼭 돌아서면 그들의 언행이 무례함이었다고 200% 깨닫게 되는데, 어쩔지 모를 수치스러움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이를 삭히는 것 역시 나 혼자만의 수련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렇게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노예근성을 레벨 업했다.


나의 하찮은 마음 그릇이 드러나는 순간들

언젠가 내 안에 쌓여있던 '화'들이 내 일상에 예고 없이 표출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주로 나의 주사로 발현되었는데, 어느새 거나하게 취할 쯤이면 '대감집 사람 대하는 말투'로 무례하게 굴었던 그 클라이언트의 말투를 따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 그거는 내가 잘하지, 그건 그렇게 하면 안돼~, 어~허~ 그거 그렇게 해서 되↗겠어↗?"


진짜 오마이갓이다. 미친 거 아닌가.


불행 반 다행 반 필름이 잘 끊기지 않는 성질 덕에, 다음날 술이 깨면서부터 오랫동안 현실 자각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저질렀던 대사, 몸짓, 뉘앙스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심지어 상대방의 당황스러운 표정까지 기억이 나는 것 같다.


물론 친한 친구인 점을 감안하여 상대방을 깍아내리거나 불쾌한 언사라곤 할 순 없지만 내 모든 대사의 뉘앙스는 '그 사람을 따라 하는 대감집 마님' 시늉을 했던 건 분명했다.


꼬리를 무는 자책감으로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내 그릇이 얼마나 작고 허술했으면 그토록 괴롭히던 '그 대감님의 말투'가 무의식에 침범하도록 두었을까? 아냐 처음부터 그 대감님은 잘못이 없었을지도 몰라. 내 인성 자체에 문제가 있었나..

나는 어디서 결핍이 생겼을까? 아예 일을 하지 말아야 하나?



심신을 안정시켜주는 숲


대감 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로 다짐했다.

'더 이상은 억울해서 안 되겠다.'라는 오기의 감정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좀 더 이성적으로 단단해지리란 다짐이었다. 그들이 무례한 요구를 할 지어도, 말투가 어떻든 신경을 좀 건드릴지언정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덤덤하되 또 최대한 조리 있어 보이게 거절하기 시작했다. 거절의 텍스트를 몇 번이나 고치고 고쳐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전송을 누른다. 대부분 언짢은 기색이 도는 답변을 받지만, 긴 거절의 문장이 무안하리만큼 쿨하게 수긍하는 답변도 받는다.


 거절 문구를 회고할 때마다 또는 언짢아하는 답변을 받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된 채 '아 그냥 해준다고 할까..'라는 비굴의 마음을 마주한다.


그럼,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나를 지키는 주술 "아니 그럼 나는 누가 지켜"라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한 번 뱉어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용기와 함께 나를 스스로 지켰다는 뿌듯한 감정도 올라온다.

그리고 이 일 아니어도, 나는 먹고살 수 있어!라는 강인한 단언의 문장도 번뜩 떠오른다.


 어쩌면 그들은 절절 메는 나를 구워삶기 쉽다고 생각했던 것보단, 나 혼자 씩씩되었단 사실 조차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배려에 무지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더 이상 둘 중 어느 쪽이 사실이든 상관없다. 아니 적어도 마음에 생채기가 날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 말하든 타격감이 줄어드니, 요즘엔 가끔 무례한 요구를 받아도 약간의 생색과 함께 받아주기도 한다. 뭐, 일정에 변수가 생길 만큼 무리한 것만 아니라면 그냥 지는 쪽이 마음 편한 것도 있고.


나를 돌보는 시간을 내어 부지런히 살아보련다. 글도 꾸준히 쓰고, 요가도 꾸준히 하고, 또 옆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남자 친구와 가족들에게 더 살가운 표현을 하며 내 마음의 정원을 단단히 꾸려야지.



책 - 모순



· 글: YEON

· 사진: 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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