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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우 Mar 07. 2022

아버지의 바다

사파이어 이야기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우리 가족은 전남 영광에 있는 가마미 해수욕장에 갔다.


9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광주에서 영광까지,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는 대장정의 피서길이었다.
대략 2살 터울인 7남매들은 둘씩 셋씩 손을 잡고 부모님 뒤를 따랐다. 머리 만한 수박이며 가서 먹을 음식을 바리바리 들고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피란민 모습이었다. 때는 70년대 후반, 당시의 피서 풍경이 모두 비슷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거리는 한 여름 땡볕으로 이글거린다. 터미널까지 가는 동안 나는 여동생의 손을 잡고 다녔다. 대 식구의 이동이라 부모님도 우리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으니 여동생을 챙기는 것은 내 몫이었다. 거리에서 죽은 개구리를 보았지만  막대기로 건드려보지 않았다. 일 년을 기다린 즐거움을 만나는데 개구리쯤이야.

 터미널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각자에게 표를 나눠줬다. 늠름하게 차장 누나에게 표를 건네고 싶었지만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차는 도심을 벗어나 비포장 도로에 접어든다. 도로 옆으로 끝도 없이 논이 펼쳐진다. 아버지가 까준 계란을 오물거리며, 달리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넓은 평야에 한 두 채 집이 서있는 전형적인 시골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면 파란 벼들이 일제히 머리를 흔든다. 그 모습이 마치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를 벌름거려 보니 신기하게도 정말 어디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누나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재잘거린다. 버스는 한여름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막 잠이 쏟아지는데 뒤에서 소리가 났다. 대학생 형, 누나들이 기타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눈을 감으니 노랫말처럼 대낮인데도 해변에서 온통 별이 쏟아졌다.

옆으로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계란을 더 먹고 싶어 깨울까 하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햇살이 아버지의 손등 위에 앉아 있다.햇살을 잡으려 손을 뻗어 보았다. 햇살은 나비처럼 날아 내 손등 위로 옮겨 앉는다. 너무 눈부셔 파랗게 보이는 햇살은, 파랗게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사파이어 반지 사진출처: www.pinteret.co.kr


바다를 닮은 보석, 사파이어

파란색을 보면 항상 떠오르는 보석이 있다. 바로 사파이어다. 물론 사파이어는 꼭 파란색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파란색은 사파이어의 대표적 색이다. 짙고 푸른 바다를 닮은 보석이 사파이어다.

사파이어는 광물학적으로 커런덤(Curundum)으로 불린다. 무색 커런덤에 소량의 원소가 들어가면 다양한 색이 만들어진다. 철과 티타늄이 있으면 파란색 사파이어가 되고, 크롬은 붉은색의 루비가 된다.

엘로우, 핑크, 블랙 등 파란색과 빨간색 외의 사파이어를 팬시 사파이어로 부른다. 팬시 사파이어 중 스리랑카 파파라차 (padparadscha)가 가장 유명하다. 노을빛에 빛나는 연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진홍 빛 사파이어다.

사파이어는 푸른색이란 뜻의 그리스어 사페이로스(Sappheiros)와 라틴어 사피루스(Saphius)에서 기원을 두고 있다. 고대인들은 지구가 사파이어로 이루어졌고 하늘이 파란 것은 바로 사파이어가 반사된 빛 때문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지구와 하늘은 서로 빛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사파이어는 하늘의 신성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사파이어는 특히 성직자 들와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파이어는 진리, 충실, 성실, 순결을 상징하는 보석이다.

세계 최고 품질은 인도의 카슈미르(Kashmir)의 사파이어다. 이곳 사파이어의 색은 공작의 목 색깔 같은 짙은 청색에 벨벳 느낌의 윤기가 난다 하여 피코크 블루라고 부른다. 1900년대 초에 개발된 카슈미르 광산은 고작 10년 정도 채굴하고 고갈되어 희소가치가 매우 뛰어나다. 그 외 사파이어의 주요 생산지는 미얀마, 스리랑카, 마다가스카르, 호주, 미국 몬타나가 있다.

 사파이어를 가만히 바라보면 깊은 바다가 느껴진다. 그래서 사파이어를 바다의 심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파이어는 다이아몬드와 더불어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보석 중 하나이다. 티파니. 까르띠에 불가리 등 세계적인 명품 주얼리 브랜드들 모두 사파이어를 주요 컬랙션으로 다루고 있다.  

아버지가 건네 준 바다

버스는 어느덧 영광 가마미 해수욕장에 도착한다. 가마미는  해수욕장 뒤 금정산이 마치 멍에를 진 말꼬리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해수욕장에는 이미 파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로 넘실거린다.  

바닷가사진 

넓은 파라솔이 있는 평상 위에 먹거리가 펼쳐진다. 주인공은 역시 광주부터 먼 길을 따라온 머리보다 큰 수박이다. 쩍 속살이 드러나고 나와 동생은 환호성을 지른다. 수박을 한입 베어 문다. 주르르 가슴까지 수박 물이 흐른다. 그 모습을 보며 누나들이 까르르 웃는다.

식사가 끝나자 백사장을 달려 바다로 뛰어든다. 뒤따라 온 아버지가 나를 들어 튜브에 앉힌다. 파도에 제대로 몸을 실으려면 발이 닿지 않는 먼 곳이라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 어깨를 잡고 있어 전혀 무섭지 않다.

 저 멀리 수평선으로 하얀색 크레파스로 한 줄이 그어진다. 작은 선이 조금씩 커지더니 하얀 고양이가 된다. 조금씩 커지던 고양이는 하얀 고래로 변한다. 집채 만한 흰 고래는 순간 나를 덮쳐 등에 태운다. 하얀 물을 뿜으며 빠르게 달린다. 1년을 애타게 기다렸던 짜릿한 순간이다. 잠시 후 튜브는 해변에 멈춘다.

다시 파도를 타고 싶은 마음을 아셨을까?  아버지는 튜브에 앉아 있는 내게 손을 내민다. 아버지의 등 뒤로 파란 바다가 보였다. 바다가 아버지의 등을 타고 내려와 손을 따라 내게 건너온다. 아버지가 건네준 푸르디푸른 바다. 바다는 내 심장을 온통 채우고  출렁거린다.

바다의 심장, 사파이어

사파이어를 가장 사랑한 것은 영국 왕실이었다. 빅토리아 영국 여왕은 결혼선물로 사파이어 브로치를 받았다. 딸인 빅토리아 2세는 이것을 지금도 착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파이어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1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의 약혼반지 때문이었다. 14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18캐럿의 사파이어 반지. 맑고 청초한 푸른빛의 사파이어는 아직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사파이어 반지 사진출처 :www.pinterest.co.rk 


1998년 영화 타이타닉은 다시 한번 세상을 사파이어 신드롬에 빠지게 했다. 여주인공 로즈는 타이타닉의 침몰로 사랑하는 남자를 잃었다. 서로의 사랑의 징표는 바로 대양의 심장(Heart of the Ocean)이라는 사파이어 목걸이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할머니가 된 로즈는 84년 동안 간직했던 대양의 심장을 바다에 던진다. 둘의 간절한 사랑은 바다의 심장이 되어 빛난다.

아버지의 바다

아버지와 산책을 나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힘든 표정이 역력하다. 서둘러 벤치를 찾았다. 올해 90세가 되신 아버지와 아들은 나란히 벤치에 앉는다. 아버지는 멍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다. 아버지의 시선은 긴 시간의 바다를 거슬러 혹시 그 여름날에 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 손등에 햇살이 내려앉는다. 가만히 햇살을 잡아 본다. 아버지의 손이 잡힌다.  무엇인가 뭉클한 것이 아버지 손을 따라 내 손을 타고 넘어온다. 그대로 심장으로 들어간다.

딸깍, 심장에 불이 켜진다. 사정없이 뛰기 시작한다. 아니 출렁거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다, 출렁이는 바다였다.

그 해 여름, 아버지가 아들에게 건네준 바다. 

아버지의 아버지에서 그 아버지의 아버지에게로 이어진 바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하고 깊은 인연의 바다가 사파이어처럼 빛나고 있었다.

                           카슈미르 사파이어 사진출처: www.thenaturalsapphirecompan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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