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를 조수석에 태운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학교 근처 저수지로 자주 향했다. 당시 엄마의 자동차는 2000년식 현대자동차 아반떼 XD. 엄마는 (엄마와 닮은) 통통하고 부드럽게 생긴 아반떼 XD의 디자인을 좋아했다. 아반떼 실내도 엄마의 품을 닮아 안락했다. 공조와 오디오 조작에 필요한 버튼류들마저 부드럽게 눌렸으니까. 그 감각들이 아직 생생하다. 뒤따라오는 차들에게 앞으로 가라며 갓길로 비켜주던 우리의 의식에 뒤따르는 보상으로 천천히 달리며 경치를 즐겼다. 엄마의 운전 매너는 지금 생각해도 시민 사회 최고 가치였다. 드라이브 코스에는 허브 농장과 슈퍼마켓이 있었다. 허브를 엄지와 검지로 비벼 손끝에 밴 향기를 킁킁 맡는 방법도 거기서 엄마가 가르쳐 주셨다. 슈퍼마켓 입구를 우두커니 지키는 커피 자판기 앞에 차를 세우고 엄마는 밀크커피를 나는 우유를 뽑아 마셨다. 차 안에서 엄마는 소프라노 신영옥의 가곡과 찬양사역자 송정미의 가스펠 카세트를 틀고, 볼륨을 높였다. 나는 우유와 음악을 한 모금씩 마시며, 엄마에게 재잘재잘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나의 작은 고민을 엄마는 커다란 귀와 품으로 들어주셨다. 엄마의 자동차가 그렇게 나를 키웠다. 이제 엄마의 운전석을 차지한 나는 조금이라도 목적지에 빨리 가겠다고, 숨을 참아가며 가속페달을 밟는다. 뒤따르는 자동차에게 내 길을 먼저 내주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계절별로 피고 지는 풀잎을 들여다볼 때마다 새삼 그렇게 평화로운데, 나는 왜 그렇게 비싸지 않은 낭만과 사랑하는 이의 작은 신음을 쉽게 놓치는 걸까.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때 엄마의 드라이브가 얼마나 고귀했는지, 얼마나 현숙한 여인의 안식 그 자체였는지. 가끔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허전해질 때 엄마에게 운전을 배웠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그것만 한 성취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림 성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