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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집단무의식에 제동 걸고 시스템을 정비하라

인간 문명사회, 게임의 룰(rule)을 바꿀 때가 되었음을 공감한 결과

최근 뉴스에 자주 언급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넷플릭스'라는 스토리 콘텐츠 영상(영화, 드라마, 다큐, 애니메이션 등) 플랫폼 글로벌 기업이 한국인의 기획/각본/감독에게 투자하여 제작, 공개한 드라마 제목 '오징어 게임'이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연휴 기간을 활용해 총 9부작 러닝타임 약 8시간 정주행에 성공했다.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느끼는 것도 많았다.

그래서 직업병인 분석질을 이제부터 해보고자 한다.


모든 콘텐츠는 3가지 요소[①신선함 ②재미(몰입감) ③감동(공감)]만 만족하면 묻지마 성공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쓴 다른 브런치 글 중에 영화('기생충', '조커', '배심원들' 등) 후기 관련 내용에도 종종 언급한 내용이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궁금한 분들은 글목록에서 해당 영화 제목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된다.


대략의 방송언론사들 뉴스 보도 및 기사 내용을 요약하자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흥행 성공 요인을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로 분류해서 꼽을 수 있다.

① 만국 공통인 어릴적 맨손으로 놀던 추억의 게임을 소환, 소재로 선택한 신선함

② 데스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플롯의 특성상 누가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대한 흥미진진, 재미, 몰입감

③ 현재 인간 문명사회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선명하게 지적한 것에 공감

그리고 덧붙여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인 관심과 인기를 얻는 것에 한껏 고무된 내용으로 갈무리된다.

본 글에서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왜(Why)?라는 것에 방점을 찍고 분석하고자 한다.


첫 번째, 왜 어릴적 추억의 게임이 신선함을 주었을까?

사실 신선함이라기 보다는 현재의 삶보다 그때의 삶을 동경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어릴 때는 가난과 부에 대한 개념은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이 내 삶 전체를 지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 시절의 유일한 목표점은 그저 재미를 추구하는 삶이며, 그 재미 속에 함께한 인간관계는 그 어떤 기회, 과정, 결과에 있어서 균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웠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현실의 삶에서보다는 말이다. 즉, 현실이 미래의 희망을 담기보다는 과거의 추억을 담을 때 더 마음의 안정을 준다는 것이 핵심이다.


가난한 자와 부자의 공통점이 뭔지 아나?
 바로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본 드라마에 나오는 말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말했는지는 스포일러이니 자세한 묘사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이 대사가 바로 우리 삶의 천착이라 일컫는 드라마(Drama), 그리고 현재 2021년 9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는 '오징어 게임'의 출발이자 끝을 한 마디로 함축한 명대사라고 생각한다. 이 맥락을 좀 더 이해하고자 한다면, 내 브런치 글 중에 "우리가 쫓는 행복의 실체를 찾아서"(https://brunch.co.kr/@2lab/7)라는 제목이 있으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아울러 여기서 '재미'는 4차 산업혁명의 가장 큰 지향점인 일종의 '자아실현'과 그 맥락이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또 다른 브런치 글"4차 산업혁명 쉽게 이해하기!(https://brunch.co.kr/@2lab/41)"를 참고 바란다.

두 번째, 왜 데스 서바이벌 게임 플롯은 흥행이 잘 될까?

물론 해당 플롯의 모든 콘텐츠가 다 흥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유독 근래 흥행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데스 게임 플롯이 많다. 대표적인 소재가 바로 좀비물이다. 죽느냐 사느냐 서바이벌 어젠다에 충실한 전형적인 데스 게임 플롯으로 구성된 스토리 소재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좀비물에서나 볼 듯한 영상 묘사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내용상으로 장기매매라지만 시체 배를 가르며 장기를 적출하는 장면에서 고스란히 내장을 보여주고, 또 게임에서 탈락한 이들을 무차별하게 총으로 헤드샷을 날리는 장면에 뇌수가 쏟아지는 묘사 등은 모두 좀비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수 분장, 효과다. 이런 장면에 우리들이 몰입하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음을 상상으로나마 일부 공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우리 삶 속에 깊이, 약자는 잔인하게 죽어가고 있는 반면, 강자는 이들을 언제든 아무 거리낌 없이 내칠 수 있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이, 뭔가 가슴에 맺힌 형언할 수 없는 자극을 눈으로 직접 목도함으로써 그 순간만큼은 희열을 느끼는 것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장면을 정서적으로 힘들어하여 보기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당 드라마를 보느냐 안 보느냐가 아니라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는 결국 하나라는 점이다.


약육강식
해당 플롯이 관통하는 정서다.

세 번째, 왜 계급사회를 표상한 스토리에 전 세계가 공감하는가?

영화 '기생충', '조커' 그리고 '오징어 게임' 모두 계급사회를 메타포로 꼬집고 있다.

과거 봉건시대, 제국주의를 넘어 인간 존중의 문명사회로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는 자평하며,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지만, 결국 현실은 정글이나 밀림 속 동물의 세계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세상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약육강식의 동물 사회를 탈피하고자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며,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우리나라도 불과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난 역사가, '역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써 다시 봉건주의의 계급사회로 회귀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의 유전적 DNA에 각인된 육식동물의 본성이라고 치부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겠으나, 난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각자의 경험칙으로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래서 말인데 우린 벌써 민주주의에 적응해 버렸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 부작용을 경험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이제 그 부작용이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업고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문제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정치-경제-사회-문화 순으로 권력은 재분배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정치를 시민들이 손수 바꾸면 나머지 경제-사회-문화도 바뀔 수 있다고 믿었기에 민주주의 제도의 꽃인 국민투표를 우리 선배들의 피땀 투쟁 결과로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유통기한이 있고 경제 자본에는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결국 민주주의는 퇴색되었다. 굳이 정치는 유통기한이라고 표현한 것은 통(通), 즉 정치를 통하면 못할 것이 없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음을 지적하고자 선택한 단어다. 즉 정치는 임기라는 것이 존재함으로써 정치권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유한하지만, 경제 자본을 통해 얻는 이익은 죽을 때까지, 아니 자자손손 무한함을 우리는 재벌 사례를 통해 경험함으로써, 더 이상 정치-경제-사회-문화 구조가 아닌 경제-정치-사회-문화로 뒤 바뀌게 되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런 현상을 가장 끝단에 있는 분야인 문화, 다시 말해서 스토리 콘텐츠 영화나 드라마로 풍자함으로써 거꾸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여기서 대한민국은 바로 글로벌 모집단의 표본집단으로 적중된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한국이 표본집단의 반응이 집약적으로 잘 표출된 표준 국가가 된 것이다.

이유는 추정컨대 한국은 1950년 6.25 전쟁으로 일순간의 모든 시스템이 리셋되어 재건된 국가이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사회 기반시설부터, 교육, 직업,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 다 일종의 초기화된 상태에서 한민족 한뜻으로 쉼 없이 내달려온 반세기의 결과로, 전 세계 펜데믹의 순간에도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손꼽히며 K방역을 선도하고, 문화 역시 K-pop, K-contents로 그 명성이 입증되고 있음에, 이런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적 표상으로 등장하게 된 것으로 사료된다.


결국 이 '오징어 게임'도, '기생충'도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현시점의 전 세계인들의 집단 무의식이 작금의 사회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미래가 낙관적이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 전반적인 시스템 재정비를 통해, 돈으로 돈을 버는 시스템(예, 금융 및 부동산 투기 자본)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단순히 억강부약만으로 극복할 타이밍은 이미 놓친 듯하다. 이제는 민주주의로 바로 세운 국가시스템이 역으로 무한한 권력의 경제 자본주의를 혁신적으로 바꿔야 하는 시대적 소명의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이를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로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국가가 국민들을 대신해서 공동구매자를 자처해, 국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 의식주를 국가가 책임지고 저렴하게 구매 생산하여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그 결이 다르다. 즉,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나 AI 기술이 대체하고 있는 가운데, 일자리가 없어 모두 다 힘들어하는 이때에, 새로운 판도에 플랫폼으로 불과 10년도 안돼서 수조 원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기업들이 등장하는 경제구조에서 이제 개인들의 경제활동을 단순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전 근대적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은 기계, 기술력, 인공지능 등의 무형 가치에도 충분한 세금을 책정하고 이를 사회에서 거둬들여 최소한의 기본 생존권을 모두 다 가지고 살아가도록 시스템을 대(大)변화시키지 않으면, 작금의 봉건화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러면 꼭 재원 부족을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건 이전에 나의 글 '너 변했어... https://brunch.co.kr/@2lab/183' 글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덧붙여 핀셋 복지 등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추가로 한 마디 거들자면,

모두가 배고플 때는 눈앞에 음식이 부족해 보이지만, 모두가 배부를 때는 빵 한 조각도 나누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줄 때는 모두에게 주고, 거둘 때는 배부르게 한 다음에 거두라는 말이다.
즉, 배고픈 자에게 배부른 자의 잔반 마저 선택해서 주겠다는 헛소리는
이제 더 이상 못하게 말이다.


핀셋 들고 설치다 진정한 요구자 놓쳐 아사(餓死)하게 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으로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약육강식의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두 다 강자가 되거나 모두가 약자가 되는 길 밖에 없다. 무엇이 옳은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강자, 약자 개념은 상대적인 것인 만큼 우리 머릿속에 있는 막연한 강자, 약자를 지우고, 삶의 결과보다 과정에 천착하며, 매사에 재미를 느끼며 자아실현의 행복한 인생을 우리 모두가 누리기만을 소망할 뿐이다.

덧붙여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규칙이 이 사회에서 은유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해봤다.

공감하는지 여부는 각자 읽어보고 판단하기 바란다.

일부 스포일러라고 느낄 수도 있는 내용이 있으니 안 본 사람 중 스포일러에 민감한 사람은 건너뛰기 바란다.

다만 이 글로 여러분들의 사고가 조금이나마 확장되었다면, 그걸로 족한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규칙의 메타포 분석>


제1항. 참가자는 게임을 임의로 중단할 수 없다.

[분석]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한 번 이 사회에서 태어나면 죽기 전에는 중단할 수 없다.

저출생(저출산 대체 단어) 현상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부모의 세대보다 자녀의 세대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이 무너지는 현세대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정서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부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던 시대가 이제는 왜 날 낳았나 행복하게 해 주지도 못할 거면서, 헬조선 등의 원망의 말들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자본주의의 무한한 권력 지속 시스템이 만들어낸 부작용이라고 판단한다. 돈 없으면 부모도 될 수 없는 세상 말이다.


제2항. 게임을 거부하는 참가자는 탈락으로 규정된다.

[분석]

사회 시스템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거부하면 결국 소외자가 된다.

정보 기술 소외자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수십 수백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모두가 지녀야 하는 세상이 되었는가?

불과 십수 년밖에 안되었다. 국민 한 명당 하나의 스마트폰이 필수인 시대, 이 정도면 국가가 공동 구매해서 나눠줘야 하지 않겠나!

능력을 떠나 원치 않아도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기본 생존권 보장은 이제 보편타당한 정서다.

예전에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고 말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절이 중이 떠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중이 없는 절을 절이라고 말할 수 있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지원하며 생색내는 부의 재분배가 아닌 기본 생존권으로 누구나 보장되어야 한다. 요즘은 거지도 무릎 끓고 한 푼 줍시오~하지 않는다. 모금함 두고 자진 기부를 기다리지... 생존을 요구해야 하는 세상은 이미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임을 반증하는 것이니 이점을 자각했으면 한다.


제3항. 참가자의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

[분석]

민주주의가 현재의 가장 진보된 사회 결정 시스템이라고 주장하나 오류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됨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수가 오른쪽 길을 택했다고 해서 그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님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도 이런 계기로 스토리가 연결된다. 더 이상의 설명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자제하겠다. 다만 우리 모두가 소수 의견을 무시하는 사회가 될수록 나의 의견도 생존권도 무시될 수 있는, 언제든지 또다시 전체주의 사회로 변모할 수 있는 기회가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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