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일은 무엇일까?
이 한 가지 질문에 여러 답이 달려 있다.
한국에 돌아와 2018년 6월 26일 화요일자 경향신문, ‘노동의 첫새벽’ 다섯 번째 기획에서 본 삼성경제연구소의 국가별 노동관 설명이 깊게 남았다.
사람은 일을 통해 삶의 큰 부분을 채운다. 노동 없이 ‘정상적인’ 일상을 꾸리기란 어렵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고, 그 목적은 정당한 노동을 통해 실현된다. 그렇다면 이왕 하는 일, 내가 좋아하고 적성에 맞을수록 행복에 가까워질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현실에서 돈이 우상이 되면 적성보다 연봉과 지위가 앞선다. 충분한 성찰 없이 그쪽으로 몰린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정한 성공이 승진과 억대 연봉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남이 보는 행복은 나의 행복이 아니다.
그 기사에는 국가별 노동관이 제시돼 있었다. 한국과 스페인은 ‘생계수단형’으로 돈과 일을 최우선에 둔다. 만족이나 흥미보다 경제성을 중시한다. 미국은 ‘자아실현형’으로 일의 흥미, 성장 가능성, 관계 만족을 균형 있게 본다. 일본은 ‘관계지향형’으로 흥미나 사회적 기여보다 조직 내 관계와 충성심을 중시한다. 프랑스는 ‘보람 중시형’으로 흥미와 발전 가능성을 중시하며, 조직 충성이나 관계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국가마다 일의 관점이 다르다. 한국처럼 ‘생계유지형’ 시선이 강하면 노동 시간과 강도가 커지고, 일의 비중이 삶을 잠식한다. 근대화가 늦었어도 한국인은 근면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중진국의 문턱에서 많은 것을 얻었지만, 양적 성장의 욕망에는 끝이 없다. 가장들은 가족을 위해 밤낮없이 달리고, 보상도 뒤따른다. 그런데 정년을 무사히 지나 노후를 누릴 수 있을까? 경주마처럼 일을 우상으로 섬겨온 삶에서 어느 날 갑자기 ‘영웅’이 떠나가면, 허무가 남는다.
내게 인생의 의미였던 ‘일’이 떠나간 뒤, 모든 게 허물어지는 감각. 건강도 흔들린다. ‘나 = 일’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음은 공허해지고, 그렇게 일에만 매단 채 조용한 병실에서 삶을 마감하는 상상을 한다.
그렇다면 일하면서 여가에 취미를 즐기면 되지 않을까? 한국은 원래 일을 많이 한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두바이의 한국인들 역시 명절에도, 주말에도 일한다. 시차 때문에 한국의 근무 시간이 새벽이면 그때도 일한다. 교회에서도 일을 이어가고, 인원이 적어 한 사람이 여러 부서를 맡는다. 회계가 인사와 구매까지 겸하는 식이다.
워라밸? 그 말은 일과 삶이 분리될 때나 가능한 개념처럼 들린다. 현실에서 둘은 칼로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토마스 바셰크의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은 워라밸 담론이 “노동과 삶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혼란을 키운다고 지적한다. 좋은 삶이 노동 바깥에서만 이루어지고, 일을 쉬어야만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내 과거의 일하는 방식은 유목형이었다. 집, 자동차, 카페, 회사, 거래처—장소의 구분 없이 노트북과 전화로 일했다. 삶과 노동이 뒤섞였고, 그만큼 자기관리와 절제가 필수였다.
두바이에 머무는 동안, 나는 알았다. 사막은 지구의 초록만 말리는 게 아니다. 내 가슴도 건조하게 만들었다. 새벽이슬 한 방울도 삼키지 못한 채 풀잎은 사라지고, 겨울빛 같은 푸른색은 바래갔다. 황토빛 땅과 집, 바람 사이로 잠깐 올려다본 파란 하늘—곧 눈을 감는다. 뜨거운 눈물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눈꺼풀이 와르르 무너진다. 시선이 흐려지니 청각도 무뎌지고, 말수도 줄었다. 비 온 뒤 풀내음 대신, 선인장 가시가 인중을 찌르는 통증을 감수하며 겨우 향을 맡는다.
그래서 결심했다. 한국으로 돌아가자.
—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