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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 나날들

by 김민찬

회사에서 일 얘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이 없는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외로움이 몰려올수록 잠들기 직전까지 핸드폰 화면에 매달려 있었다. 어느 날 점심을 사러 까르푸에 들렀다가, 한국에서는 눈길도 주지 않던 꽃들이 불쑥 손짓했다. “한번 키워보라”고.


두바이 숙소에서 기르기 시작한 것은 선인장이었다. 말벗처럼 굳게 옆을 지켜준 친구들.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함께 살던 동료에게 “잘 부탁해”라고 전하며 떠나야 했다. 그런데 그때야 알았다. They got me. 큰 해바라기며 이름 모를 울긋불긋한 꽃들, 모두 조화였다. 마음이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허탈했고, 다른 한쪽은 갑자기 밀려온 허기로 무릎이 탁 꺾였다. 왼쪽 무릎이 따끔하게 저려왔다. 너무 가혹한가—싶은 찰나, 머리에 작은 꽃을 꽂은 꼬마 선인장들이 깔깔 웃는 듯 나를 올려다봤다.


두바이는 건조하고 척박해 꽃보다 선인장이 잘 자란다. 그래서일까, 선인장은 흔했지만 값이 만만치 않았다. 몇 번을 지나치다 끝내 회사 동료가 장미 한 송이를 고르는 날, 내가 찜해두었던 여섯 ‘꼬맹이’ 선인장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집에 오자마자 “잘 있었니?” 인사를 건네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두바이 하늘 대신 분무기로 실낱 같은 비를 뿌려주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도 잊기 어렵다. 이곳의 에미라티들은 주로 공공 부문이나 고급 직종에서 짧은 시간 일하고도 좋은 보수를 받는다. 반면 힘든 노동은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서비스업은 필리핀 사람들이 주로 맡는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도 인도, 파키스탄 동료가 많았다. 그들은 고국의 가족에게 매달 성실히 돈을 부쳤다. 방값을 아끼려고 작은 방에 3층 침대를 여러 대 들여놓고 여럿이 함께 지냈다. 하얀색 통근버스엔 에어컨조차 없어, 사막의 열기를 통째로 싣고 건설 현장으로 달렸다. 인건비가 한국보다 낮다 보니 서비스업은 기묘할 만큼 잘 굴러갔다.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다 먹고 일어나면 직원이 살피다 자연스레 치워주었고, 한인 마트에서 쌀을 사면 포터가 주차장까지 묵직한 봉지를 들고 나와 차에 실어주었다.


이곳에선 금요일이 일요일이다. 그래서 금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이슬람 국가라 교회 건물은 드물어 우리 교회는 장애인학교 강당을 빌렸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 사람들은 핸드폰 앱으로 성경을 읽거나 정면의 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드물게, 나처럼 두툼한 성경책을 무릎 위에 올려둔 이들도 있었다. 그날도 설교 말씀을 핸드폰 메모에 옮겨 적고 있는데, 진동이 울렸다. 한국에서 온 급한 전화 같았다. 그 시각 한국은 금요일 오후 네 시쯤. 강당 밖으로 나가 30분 남짓 통화를 마치고 돌아오려 했더니, 문에는 ‘Closed’ 표지. 어쩔 수 없이 로비에서 예배가 끝나길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되어 복도에서 김가루를 솔솔 뿌린 밥을 연거푸 세 그릇이나 비우고, 레몬 한 조각 띄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시원한 공기가 도는 두바이 몰로 향했다.


니체 (F.W Nietzsche, 1844~1900)



니체는 말한다. 삶의 의미를 아는 자는 어떤 시련도 견딜 수 있다고. 나는 두바이에서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결국 세 달 만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왜 두바이에 갔을까. 한국의 삶이 버거워서였나, 아들 교육 때문이었나, 혹은 단지 도피였을까. 한국에 돌아와서는 시차와 문화의 파도에 휩쓸려 한동안 멍한 얼굴로 웃음을 잊고 살았다.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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