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프렌치 Libre
서른다섯 즈음 되면 아이 엄마가 돼 있을 줄 알았다. 현모양처 같은 대단한 꿈은 없고 그저 일과 가정을 종횡무진 활약하는 멋진 워킹 우먼 쯤. 우아하게 아이를 돌보다가 어느 날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샴페인 한잔 따라 놓고 프렌치 식당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는 그런 상상을 했었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환상이었는지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아이를 낳으면서 깨닫게 됐다. 아이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밥상을 엎고 사고를 쳤다. 프렌치 식당의 디너는 생각보다 비쌌고 직장인의 점심때는 생각보다 짧았다. 미셸 오바마 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일과 가정을 모두 잘해낼 수 있다는 신화는 그야말로 ‘bull shit’에 가까웠다.
한국에는 <사는 게 뭐라고>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 원제는 <役に立たない日々>다. 직역하면 ‘쓸모없는 나날’쯤 된다. ‘쓸모 있다’가 어떤 목적을 이루는데 역할이 있는 대상에게 쓰이는 말임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쓸모가 없다’는 말은 목적은 있으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또는 목적도 없고 그래서 역할도 없는 것쯤 되려나.
책은 일흔에 가까워 시한부 암 선고를 받은 독거 할머니의 일기 같은 기록을 엮은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시시하지가 않다. 이 할머니는 암 선고를 받자마자 타고 싶어했던 녹색 재규어를 한대 뽑는다. 친구를 미워하다가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독설을 퍼붓다가도 금세 소심해진다. 어느 날은 유행하는 한류 드라마를 보다 턱이 돌아간다.
사노 요코씨의 나이쯤 된 나를 상상해봤다. 결혼은 했을까, 자식은 낳았을까. 아직도 결혼을 못했을까, 파트너는 있을까, 반려 동물을 들였을까. 어린 시절 상상했던 것처럼 어느 장면 하나도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육아와 프렌치 식당 같은 황당무계한 상상을 할 정도로 어리진 않다는 방증인가 싶었다.
다만 밤새 일본 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 턱은 한 번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 장면만은 어찌 됐던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게 가장 있을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프렌치를 즐기려는 나의 욕망은 좀 더 현실적이고 멋지게 진화했는데 하얗게 샌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쪽지고 그 나이에 딱 맞는 샤넬 트위드 재킷을 걸친 채 홀로 한낮의 프렌치를 즐기는….
그러나 서른다섯의 나는 아직 가끔 너무 소심하다. 어느 날은 식당에도 들어가지 못해 길거리를 배회할 때도 있다. 혼자서 푸짐한 한 상을 시켜 먹는 것이 민망해 카페로 직행할 때도 잦다. 그렇다고 딱히 혼자서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닌데 막상 혼자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일이 망설여지는 건 어떤 이유에서 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에서 친구가 놀러 올 때면 일부러 프렌치 식당이나 이탈리안 식당을 데려 갔다. 가성비 좋은 런치야 말로 일본 식당의 미덕이라며 일부러 친구를 꼬실 때도 있었다. 친구 셋을 끌고 시로카네다카와역 근처에 프렌치 식당을 간 적도 있었다. 미슐랭 쓰리 보시(별 세 개) 파리 르상크 출신의 쉐프가 2018년 오픈한 ‘리브레’(libre)가 그곳이다. (홈페이지 정보를 보니 이후 새로운 쉐프가 취임했다)
리브레는 오픈 주방이라 대리석 카운터석에 앉아 근사한 요리가 나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캐주얼한 분위기기라 친구와 연인과 즐길 수 있는 무겁고 어렵지 않은 식당이란 인상을 받았다.
휴일 점심이라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가게를 전세를 낸듯한 기분을 만끽했다. 서버의 설명을 잘 듣고 친구들에게 매끄럽게 전달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살짝 어깨가 굳었다.
통역은 성공적이진 않았다. 디테일한 식자재들의 이름 절반은 난생 처음 들었다. 일본어로도 몰랐지만 한국어로도 생소한 단어였다. 그래도 크게 식은땀이 나거나 창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많은 설명이 필요없는 건 음식의 가장 큰 미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보고, 맡고, 맛보면 아니까 말이다.
리브레의 시그니처인 토마토 모양의 아뮤즈부쉬와 과일 모양을 본뜬 디저트(후류레)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특히 내 자리로 서빙 됐던 딸기 모양의 후류레는 베어 무는 순간 딸기 과즙이 톡 하고 터져 나왔다. 오도독 하는 소리와 함께 새콤달콤한 딸기 시럽이 입에 가득 퍼져나간다.
맛있는 걸 먹으면 웃음이 난다. 친구들과 호들갑을 떨면서 많이 웃었다. 아아, 역시 프렌치는 연인과,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하는 편이 좋을지도.
명태, 고니, 생오징어를 활용한 손바닥만 한 음식이 차례차례 등장했다. 프렌치 식당이지만 일본의 식자재를 군데군데 잘 살렸다. 다채롭지만 조화로운 색감에 눈도 즐겁다. 리브레는 음식의 색과 느낌에 따라 접시와 커트러리에 변주를 준다. 후류레의 순서는 식사 맨 끝이다. 디저트를 포함해 8품이 세입 5500엔(물값, 음료 값 제외)이니 이 정도면 하루 큰 맘 먹고 찾을 만 하다.
‘한 달에 한 번 프렌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당장 내년엔 어떤 내가 돼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돼서는 꼭 한 달에 한 번은 프렌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내가 되고 싶었다. 인생이야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는 일이라지만, 이런 목표라면 꽤 근사한 기분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
<Libre, 리브레>
도쿄 시로카네다카와역(白金高輪駅)에서 도보 3분. 특별한 특징이 없는 거리지만 길치인 저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어요. 1층 통유리라 금세 저기가 그곳이구나 할 수 있는 식당.
정성껏 만들어진 요리를 보면 정성껏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생을 나와 함께 나로 살아내야 하는 나에게, 큰 맘 먹고 프렌치 런치, 어떠신가요. 東京都港区白金1-15-36 1F, 03-6447-70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