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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동 Jul 08. 2021

내가 기억하는 맛

이미지 출처: 다음 블로그

커다란 무쇠솥 뚜껑이 열리면 하얀 김과 함께 갖가지 맛이 풍겨 나와 내 코를 간질였다.

매콤한 향은 밀가루에 버무려 찐 고추이고, 얼큰한 향이 강하면 토종고추를 썰어 넣은 된장이고, 약간 시큼한 향은 찐 가지이고…… 고소함이 가득하면 달걀찜! 내가 젤 좋아하고 기다리는 냄새였다.

엄마는 커다란 무쇠솥에 밥을 지을 때면 뜸들이기 직전에 밥솥 한쪽 가장자리에 이런저런 갖가지 찬거리를 얹어두고 마지막 잔불을 땠다.

밀가루에 버무려 찐 고추는 갖은양념을 더해 매콤짭짤한 고추찜으로, 쭈글쭈글 물렁하게 쪄낸 가지는 긴 가닥으로 가늘게 갈라 가지 챗국을 만들었다.      


밥 위에 뚝배기 채 찐 된장을 건더기 수북이 따로 떠서 할머니와 아버지의 겸상에 놓는 건 아무 상관이 없지만, 달걀찜은 달랐다. 대접 한가득 찐 달걀 한가운데를 푹 떠내서 어른들 상에 올리고 나면 대접 가장자리에 얼마 남지 않은 달걀찜을 나머지 식구 모두가 나눠 먹어야 했다. 그건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나는 그릇 가장자리에 눌어붙은 달걀까지 남김없이 박박 긁어 한데 모아 밥을 넣고 비볐다. 짭조름하게 간이 된 고소한 달걀 비빔밥은 참 맛있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겸상에서 달걀찜 같은 맛난 찬이 남아 나올 때가 종종 있는데, 그건 늦게까지 남아서 밥을 먹는 사람만이 차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진 않았다. 할머니는 밥상머리에서 떠들거나 밥을 깨작깨작하는 걸 그냥 넘기지 않았다. 얘기하느라 밥 먹는 게 늦어지거나 밥 먹는 모습이 시원찮으면 막 혼냈다. 떠들면서 밥을 먹으면 복이 나가고, 깨작거리면서 먹으면 먹을 복이 없어진다는 이유였다. (차곡차곡 쌓은 그 많은 복들은 분명 내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겠지!)

그런 탓에 밥을 먹을 때면 오로지 먹는 데만 집중했기에 다들 순식간에 해치우고 밥숟가락을 놓았다. 덕분에 어른들 상에서 남는 찬을 받아먹게 되는 행운은 여러 면에서 막내인 내 차지일 때가 많았다.     


뜨문뜨문 찬으로 나오는 달걀찜을 기다리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고소한 달걀밥을 해먹을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려면 달걀을 밥 위에 찌는 걸 미리 알아채고 그 앞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건 달걀을 깨는 그 순간 결정되기 때문이다.

 달걀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달걀을 깰 때 한쪽에만 작게 구멍을 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달걀 가운데를 반으로 툭 갈라 깨면 그걸로 끝이다.

작은 구멍으로 노른자와 흰자를 빼낸 후, 거기에 씻은 쌀 한 숟가락 정도를 물과 함께 넣는다. 그걸 솔가리로 불을 땐 재에 반쯤 묻어두면 깨진 달걀 위로 김이 푸르르 올라오는 게 보인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구수하고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나면서 꾸덕꾸덕해진다. 뜨거운 재를 헤치고 조심조심 달걀을 꺼낸다. 달걀 껍데기를 살살 뜯어내면 노르스름하게 잘 익은 달걀밥 완성이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달걀밥은 곧장 먹어 치우기 아까웠다. 왜냐면 달걀밥은 기회를 얻기도, 성공하기도 쉽지 않았다. 쌀과 물의 양, 아궁이에 남아있는 재의 열기에 따라 설익은 생쌀이 되기도 하고, 새까맣게 타버리기도 했으니까.          




모내기가 다 끝나고, 여름 장맛비가 내릴 때면 아버지는 못에서 붕어 낚시를 했고, 비가 갠 이른 아침엔 어디선가 버섯을 따왔다. 못에 물을 뺄 때면 우렁이를 주워왔다.

붕어는 배를 따서 내장을 쭉 짜낸 다음 엄지손톱으로 비늘을 훑어냈다. 그랬는데도 마지막까지 파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했다.

우렁이는 소죽을 끓이는 중간에 찌그러져 못 쓰는 세숫대야에 담아 소죽솥에 넣어 함께 익혔다. 익힌 우렁이를 바늘로 뚜껑을 따고 속을 일일이 다 꺼내는 일은 참 지루하고 달갑지 않았다.

버섯과 우렁이는 주로 두루치기를 했고, 붕어는 매운탕을 끓였다. 우렁이 두루치기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버섯의 물컹한 식감은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좋아하긴 힘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칼칼한 붕어매운탕이었다. 붕어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갖은양념을 넣고 얼큰하게 끓인 붕어매운탕의 국물 맛은 지금도 혀끝에서 느껴진다.     


이미지출처: 오마이뉴스

비가 그친 처마 끝에선 여전히 물기가 남아 똑똑 떨어지고, 자리가 깔린 봉당에 앉아서 먹었던 초여름 날 이른 저녁 풍경은 그 맛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특별한 맛은 그 본연의 맛뿐만 아니라 그걸 함께 했던 사람들과 그때의 기분과 날씨, 분위기, 냄새, 아주 사소하고 자잘한 느낌까지 고스란히 다 담아서 간직한다.     


오늘 어떤 맛과 향이 특별한 맛이 되어 먼 훗날 내 기억 저장고에 남아있을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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