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1.
동물은 인간에게 알아듣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언어를 공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는 날 동안 내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이를테면 그들이 나에게 건네고 있을 사랑이나 권고 등의 메시지를 가늠한다. 이를테면 나만의 작은 미신이랄 수 있다.
모리가 떠나감을 준비하던 날들과 떠나가던 바로 그 날까지 내게 일어난 예외적이라 할만한 사건 하나를 말하려 한다.
실은 털어놓지 않고 감추는 게 나은가 망설였다. 내게 나타난 이 징후가 어쩌면 모리가 마음을 다한 염력으로 내게 건네주는 일종의 비밀한 행운인가도 싶어서. 너무 아름다운 일은 함구하고 차라리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어떤가 했던 것이다.
마음의 힘이 다한 끝에 끝을 계속 잘라 이어붙이던 날들이었다. 희망 없는 일을, 그렇다고 놓을 수도 없을 때 그렇듯, 나는 약간은 벌 받거나 숙제 치르듯 모리를 간병 해나가고 있었다. 영락없이 바다 위로 떨어지게끔 되어있는 널빤지를 걷는 기분으로, 모리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죽음의 웨딩마치를 한 걸음 또 한 걸음.
유례없이 비가 잦던 봄이었다. 유리창을 서서히 미끄러지는 빗방울을, 애도처럼 위로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날들이었다.
몇 시간 간격으로 모리 밥을 챙겨야 하는 날들에 유일한 낙이라면 오후에 잠깐 나가 거니는 산책이었다. 비가 많은 날들에도 오후의 한 가운데 어느 토막은 개어 맑고 싱싱했다.
처음으로 내가 봄을 마주하지 않은 유일하고 이상한 봄이었다. 남들이 봄을 만끽하는 동안 나는 봄을 바라볼 겨를이 없이 오직 모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나에게 어쩌면 모리는 예기치 않은 봄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주려 하였을까?
비가 그치고 나면 천변에는 동전만 한 클로버들이 무리 지어 자라나 있었다. 잎뿐 아니라 키도 커서, 세상에 그렇게나 높이 자라 올라온 클로버는 평생 처음이었다. 그냥 그럴 뿐 더이상은 무심했다. 클로버가 크고 높네, 하며 무의식적으로 스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여자분이 내 옆을 지나는데, 손에 식물 줄기가 몇 포기 들려져 있었다.
한눈에 그것이 네잎 클로버란 걸 알 수 있었다. 잎 개수를 세어보지 않더라도, 세 잎 클로버를 일부러 그렇게 몇 포기 따 들고 갈 리는 없었다.
‘설마, 여기 네잎 클로버들이 있단 말인가?’ 혼잣말이 우러나왔다.
이 무렵 나의 이어폰 속 BGM은 늘,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갖가지 행운 음악이었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진정시키는 음악을 찾아 듣던 것이 알고리즘 추천에 의해 갖가지 행운 음악이나 행운 명상으로 옮겨가 듣게 된 것이었다. 평생 별 업적이라곤 없이 만성 신경쇠약에 몸만 여기저기 아프며 살다, 이제는 유일한 낙이자 자랑거리였던 고양이들마저 차례로 잃어가고 있던 나는 이름뿐일지라도 행운이란 말이 달가워질 법한 나날들이었다.
‘설마, 여기 네 잎 클로버들이 있단 말인가?’ 하며 눈이 번쩍 뜨인 나는 길옆의 클로버들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이때도 귀에는 바로 그 행운을 준다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음악에 휘감겨가며, 긴장되는 나날의 피로를 풀어놓으며 계속 걸었다. 걷다가, 그렇게 걷다가 문득 발을 멈추었다. 멈춘 곳에 고정된 내 시선에는 한 포기 네 잎 클로버가 맺혀 있었다. ‘내게도 네 잎 클로버가 보이다니!’, 신기해하며 클로버를 따, 책이 없는 그때엔 지갑 지폐 사이에 꽂아두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다간 또 하나를 더 발견했다. 하루에 두 개씩이나 나타난 건 정말 행운이라 믿으며, 고달픈 나날들 와중에도 오랜만에 웃으며 돌아왔다. 그리하여 그 담날부터는 아예 책을 갖고 나갔다. 혹시 언제 나타날지 모를 네 잎 클로버들을 끼워 넣기 위하여.
책이 무색하지 않게 되었다. 두 번째 날엔 더 많은 클로버를, 무려 9개나 찾아버렸다. 이때로부터는 그냥 이후 매일매일이 신비로웠다. 무심코 눈을 돌려보면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 네잎 클로버가 보이곤 했다. 그리고 한 번 나타난 곳의 근처를 둘러보면 또 몇 개씩 더 발견되곤 했다. 기분 좋은 마법에 걸린 듯 네 잎 클로버 찾기는 내 비밀스런 즐거움이 되었다.
이런지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이 기현상이 모리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고양이의 보은이란 말도 있듯이, 자신의 마지막에 가까워가면서 모리가 고양이로서의 모든 사랑을 네 잎 클로버의 형태로 주려는 게 아녔을까 싶었다. 이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네 잎 클로버는 너무 자주 나와서, 나오지 않은 날이 더 적을 지경이었다. 이게 반복됨을 느끼던 초창기에 나는 그렇게 찾아낸 그날그날의 네 잎 클로버 개수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러던 어느 날엔 웬 못 보던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다른 동네에서 잠시 여기에 온 그는 말하자면 네 잎 클로버 찾기의 달인이었다. “다섯 잎 같은 건 여기 좀 걷다 보면 여러 개 보여요. 자 여기 여기....”하며 그는 다섯 잎 두어 개를 보여주었고, 네 잎 클로버쯤은 내게 선심 쓰듯 몇 개 주기도 했다. 어차피 너무 흔하게 발견되어 그냥 나눠주곤 한다면서. 그는 여섯 잎 클로버도 가끔은 본다고 했고, 딱 한 번은 일곱 잎 클로버를 찾았었다며 지갑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여기저기 동네를 바꾸어가며 네 잎 클로버 투어를 다닌다고 했다.
네 잎 클로버 사건, 이게 내가 꺾이지 않고 꾸역꾸역이라도 살아가는 힘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내가 주저앉을만한 구간이면 야릇하고 신비한 표징들이 나타나 나를 위로하곤 했다. 이게 뜯어먹고 살 수 있는 물질적 행운도 아니라면 다른 이들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닌 대수로운 일들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뚜렷하게 다가와 마음을 어루만져주곤 하였던 것이다. 절대적인 권태나 회의에 함몰되지 않게 나를 지상으로 되돌려주곤 하던 사건들.
그리하여 모리의 마지막 순간에 가까워가던 시간은 지금 돌이켜보면 무수한 네잎 클로버들이 우거진 들판으로 다가온다. 북실 퉁실, 희거나 보라색의 클로버꽃들 사이로, 가득 신비한 모리의 눈이 훑고 지나가다가 내게 하나씩 짚어주는 광경.
마치 모리가, 지금의 모습으로는 종지부를 찍고 떠나면 남겨질 내게 필요한 남은 행운들을 모조리 찾아 한꺼번에 안겨주고 가겠다는 듯한 그 마지막 애틋한 서두름처럼 클로버들은 매일 같이 이어졌다. 적게는 서너 개부터 많게는 열 두어 개, 거의 매일이다시피 했다. 아주 많아져서는 마침내, 가진 중 가장 두꺼운 몇 권의 책 속에 그 많은 클로버들을 끼워두어야 했다. 일곱 잎 클로버까지는 못 찾았지만, 다섯잎 여섯잎들도 꽤 모은 편이다. 네잎 클로버들은 무려 200개에 달하게 되었다.
서로 나눈 깊은 사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로에게는 두말할 것 없는 기적을 남긴다고, 간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날 숨을 거둔 모리가 잠시 내 거실에서 누워 쉬며 나와의 공간과 작별을 나누던 바로 그 시간에도, 산책하며 숨을 고르던 내 눈앞엔 계속하여 네 잎 클로버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모리의 마지막 선물은 숨을 멈춘 후에도 그치질 않았다. 숨을 멈춘 게 존재의 죽음은 결코 아니라는 듯이, 늘 옆에 있다는 듯이.
존재와 생명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 적다. 실망하고 슬퍼만 하기에는 삶의 나날들은 짧지만 또 예측할 수 없이 길다. 어쩌면 때로는 삶의 경계를 넘어가기도 하면서.
모리가 가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친구에게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동네 어느 화분에 누군가 샴고양이 그림을 그려놓은 걸 봤다는 것이었다. 샴냥이들은 다 비슷하게 생겨 그 화분의 그림 또한 모리로 보였다. 왜 아니랴!
어느날엔 그 동네로 찾아가 직접 그 샴냥이 그림을 보았다. 커다란 깻잎 화분에 그려진 모리 같은 고양이. 모리와는 내 평생 이런 숨바꼭질을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