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나누는 고양이

by 래연




마음을 나누는 고양이

6. 29.

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처음 이 고양이를 만났다.

어느 무더운 8월에 밤산책을 나가 하염없이 걷다 문득 마주쳤다. 불빛 아래 한 신비한 고양이. 그 비스듬한 눈빛엔 연민이 가득했고, 그런 모습에 절로 맘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 고양이를 본 이후 다른 이름 없이 그냥 노란 고양이라고만 불러왔다.



줄곧 보이다가 또 한동안은 안 보이다 하면서, 어쩐지 주로 내가 심경의 변화가 많아 가라앉아 지내는 순간마다 희한하게도 불쑥 나타나곤 했다.

마주치는 고양이 중에서도 특히 이 녀석의 존재는 내게 의미깊은 상징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은 세계와의 연결고리, 메신저와도 같아 보였다.






요새 이상하게도, 내가 걷는 천변에는 올해 들어 6년 만에 처음으로 고양이가 절멸해 있다. 근 두 달 정도 그 어느 고양이도 보이지 않아서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년간 여러 마리 노닐던 그들이었는데 한꺼번에 모두 뚝,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 노란 고양이는 작년에도 4월쯤 마지막으로 보고선 한동안 안 보이더니, 내 맏이가 죽고 난 날 직후에 갑자기 나타나 죽 같이 여름을 보내기도 했다. 이 녀석이 축대에서 지내던 작년 우기에는, 먹이를 매일 갖다 주러 올라가기도 했다.

올해도 4월 어느 날 본 게 마지막이었다. 정말 이제 더는 못 보나 싶게 또 오래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기대라도 하여보았다. 작년에 그런 것처럼 혹시 이번에도, 모리가 가고 난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지나 않을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이 고양이뿐 아니라 천변 전체에 고양이라곤 통 볼 수 없었다.






아까도 모리를 생각하며 걷던 참이었다. 비도 그친 지금딱 고양이 한 마리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고.

그런데 고갤 들어보니 홈플러스로 올라가는 계단 위로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노란 고양이. 언제나처럼 위로를 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 오는 소리가 나자 옆의 풀숲으로 숨어 들어갔다가 다시, 계단 위로 올라온 나를 보러 나왔다.

마트에서 캔을 사다가 먹여주었다. 금세 다 비우길래 같은 브랜드 다른 맛으로 하나 더 사다가 또 부어주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특히 이런 요즘에.

이 아이가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내가 버림받지 않은 기분이다.






비포애프터

7.3.

잠을 잘 자는 것만으로도 삶의 감각에 어느 정도 풍요가 깃든다. 쾌면이란 잘 살아있다는 느낌 그 자체이다.

사실 뭐가 문젠지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겪는 문제가 일반적인 펫로스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모리가 죽은 다음 그렇게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었다. 슬픔이라면 오히려 처음 병이 진단되었던 직후가 더했다고 할 수 있다.


모리가 아프자마자, 손쓸 수 없이 죽게 되리라는 걸 알고 받아들였고, 지난 몇 개월 모리를 돌보는 동안엔 오히려 단 하루도 불면이 없이 잠을 잘 이루었었다.

작년에도 맏이를 떠나보냈었지만, 내게 이상반응이 없었다.

모리를 떠나보내고도 보통 이상으로 슬픈 건 아니었다. 단지 호스피스 기간이 좀 길어서 늘 조마조마했던 그동안의 긴장이 풀렸다는 정도였다.


어제도 그냥 누웠다가 잠이 안 오는 바람에 수면 보조제를 먹고 누웠으나 4시까지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이대로 밤을 샐 태세여서 결국 다시 일어나 항불안제를 먹고서야 조금 잘 수 있었다.

불면이 된 원인을 모르겠다. 장례식장 주변 터나 기운이 별로였어서 그런가조차도 생각했다.

그냥 어느 날 나아지겠거니 하고 지내기엔 막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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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함...

모리의 죽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본 삶의 막연함이나 무상함의 감정이 덮쳤을까? 혹은 어릴 적부터 갖고 살면서 진해졌다 옅어졌다 하는,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가 나도 모르게 부활한 것일까?

그날 집에 돌아와 모리의 스톤을 함에 넣을 때도 이상하기는 했다. 뚜렷이 아픈 거는 아닌데, 심장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 물리적 아픔도 정서적 반응도 아닌 그 이상한.

그날 이후로, 힘겹게 모리를 돌보던 날조차 근근이 유지되던 최소한의 평정 상태로 돌아가 잠들지를 못하고 있다. 걱정이다.


항불안제는 삼키는 꼴로 잠을 보장해준다고 할 만큼 직방인데, 이 의존성이 대체 언제까지 오래 갈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작년 말에 이 약을 끊고선, 의존성을 벗어나게 되었다며 좋아했었는데.

심리적으로 되짚자면, 모리의 죽음이라는 현상을 통해 내게서 봉인해제가 되어버린, 그동안 억누르고 지내온 어떤 다른 대상들에 대한 분노? 애초에 나를 곤두서게 만들고 삶을 공포로 여기게 만들었던 원인들의 침투? 내 감정과 감각과 사고의 소화 한계치를 넘어가 나를 지배하던 것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고통?

모든 걸 ‘너 할 탓’으로 돌려버리는, 개인 심리 속 감정 처리를 강조하는 말들도 참 별로이다.

내가 구체적으로 화나는 대상은, 가족, 사회적 의식과 구조, 이 전체 얼개 속에서 끊임없이 약자들을 가스라이팅하고 착취하고 지배하는 뭇 관계들, 이상하게 비열하고 얄미운 세력들이다. 죽을 때까지 피를 빨아대는, 매우 집요한.

마음 편해지잡시고 이들과 타협이나 화해를 하려 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