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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연 Mar 07. 2024

서로 모른다는 느낌은 오히려 서로라는 잔을 가득 채워



세계라는 해변에서 쌓아올리는 돌


    언젠가부터 나는 내 안팎으로의 들락날락이 유연하지 않은 이상하게 굼뜬 영혼이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건 사람이건 바깥과 교류한다는 것은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동시에 달그락거리며 혼란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뒤틀리는 일이었다. 감정의 연루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얼굴로 열이 오르고 숨은 들쑥날쑥 도무지 차분해지지 않았다. 한 번 나를 밖으로 내보내고 나면 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마음을 앉히는 게 쉽지 않았다. 에너지를 밖에 잠깐 떼어놓을라치면 내 안은 허해지고 흔들거리고 뒤섞여버렸다. 정 그렇다면 가만있으면 그만인데 문제는, 자꾸만 수다를 떨며 에너지를 바깥으로 내보내고픈 접촉의 욕구가 끝없이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어 되풀이된 행태가 있다. 학교에 가기 전에는 항상, 오늘만큼은 동요 없이 하루를 살아내겠다는 다짐을 했다. 오늘은 학교 가서 말을 아끼고 차분하게 내 안에 머물러야지 하고. 그러나 수다를 떨고 싶은 욕구가 에너지 보존의 욕구를 늘 앞섰다. 결국 시내를 이룬 말의 물결은 점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 범람하기도 했다. 어쨌든 최소한만을 말하려는 내 의도 때문인지 주변에선 하나같이 나를 조용한 아이라 여겼고, 반면 내 편에서는 애초 스스로 설정한 당위 때문에 항상 ‘생각보다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자책을 놓지 못했다. 뱉아낸 말들은 잘못 입양 보낸 아이들처럼 한사코 회한을 불러왔다. 말한 것들로 인해 아팠고 또한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로 인해 더 아팠다. 말에 대한 양가감정은 심각했다. 자의식으로 빼곡한 이러한 내면은 커서도 여전했다. 어떻게 하면 누군가와 적절히 관여될 것인가의 문제는 지속적인 화두를 이루었다. 


    이러한 내면적인 문제와 더불어, 한국이라는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는 한 뭉텅이 꺾여 같은 화병 속에 담긴 꽃들처럼 제자리를 맴돌던 문제들도 있었는데 이는 불현듯 여러 물이 섞여드는 곳에 놓이고부터는 자연스레 해체되어 새로운 방향성을 갖게 되기도 했다. 





눈 덮힌 피레네





    아예 그 누구와도 익숙할리 없는 다국적 삶의 장에서는 각자가 서로의 거리를 절충시켜 가는 와중에 새로운 소통의 리듬이 생겨난다. 서로가 공유하는 전제 없이 소통의 밑바닥 돌부터를 쌓아올려 가노라면, 자칫 묵과됨직한 일체의 섣부르고 거친 뉘앙스들이 과일 껍질 벗겨지듯 언저리로 밀려난다. 서로의 문화를 모른다는 가정 하에 사소한 것 하나부터를 설명해가야 하니 어느새 상대의 관점에 서고자 애쓰게 되면서 시선은 부드러워지고 심장은 훈훈해진다. 자주 겪는 신기한 일은, 서툰 표현으로 몇 개의 선을 그려 보이기만 해도 서로 상대가 전달하려는 전체 형태를 의외로 쉽게 짐작해내곤 했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해에 앞서 서로에게 이해의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함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완전 미지의 존재라는 느낌은 오히려 서로라는 잔을 가득 채워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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