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연 Mar 11. 2024

프랑스에서 출산율을 논하다





    그러는 사이 이제 대망의 발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학기 두 번째 주 끝나갈 무렵, 마리나는 엑스포제exposé(발표)에 대해 언급했다. 모든 학생이 순서를 정해서 사회적 주제 가운데 하나를 택해 좀 진지한 태도로 15-20분 정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진지한’이란 형용사가 발표 끝날 때까지 나를 사로잡아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교육문제를 다룰까 하다가 고작 20분 안에 소화하기엔 이 주제가 방대할 것 같아 주제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생각해낸 주제는 ‘출산율과의 관계에서 본 프랑스 가족의 변천’이었다. 

    내가 여기 처음 도착하여 지내다 다소 놀라게 된 것은, 실제로 본 프랑스가 듣던 것과는 달리 다산국가가 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이 현상은 곧장 눈에 띄었다. 거리나 대형마트에서 아이 하나를 유모차에 태운 채 양옆에 두 명의 아이를 끼고 걷는 젊은 엄마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몇십 년간 프랑스를 저출산 국가로만 알아온 나로서는 그런 풍경이 낯설고 신기했다. 현재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출산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 이 배후를 이루는 사회학적 조건들을 되짚어본다면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에 대한 해법까지 연결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구상을 충족시키려면 20분은 어림도 없을 것이다. 








    기숙사의 인터넷 연결 불통으로 2주 정도를 전전긍긍하는 사이, 다른 아이들의 발표는 코리나의 ‘원자력 에너지’를 이어 케이티의 ‘파리 교외 지역의 문제’로 이어졌다. 코리나는 산뜻한 프린트물을 나누어 주었고, 케이트 또한 간략한 자료를 배포했을뿐더러 그 자신 그 자료를 전혀 보지 않은 채로 그냥 편하게 말하듯이 발표하는 자연스러움과 능란함을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깊이 들어가지는 않으면서 다양한 측면을 소개했다. 시청각 자료까지 곁들여 각자의 기량을 뽐냈다. 이런 여유 있는 스킬들이 부러운 한편 압박으로 작용했다. 내 나름의 전략이 필요했다. 가능한 한 내용을 치밀하게 준비하기로 맘먹었다. 이 주제에 대한 원고를 만든 다음 다시 짧게 발표용으로 요약했다. 한국의 예전 캠페인 표어들, 예컨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든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등의 어구들도 나름 본뜻에 가깝게 프랑스어로 옮겼다. A4 세 장 가량이 만들어졌고 발표 전전날 이미 프린트까지 다 마쳐놓았다. 케이는 이 무렵 내 눈이 지식으로 반짝반짝 빛난다며 놀렸다. 나는 자료를 완성해가는 사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옮겨 쓰고 수정하다 보니 거의 문장들이 다 외워지다시피 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지만, 막상 발표하러 앞에 나가면 통째로 까먹고 머리가 하얘지지나 않을지 여전히 걱정되었다.


    케이티 다음은 레베카였는데, 새침한 이 아이는 몹시도 긴장해 있었다. 이 아이는 점심시간에도 코리나를 앞에 앉혀놓고 질의응답 예상문제를 뽑아놓고 연습을 하는가 하면, 자기 발표 때 때맞춰 내가 어떠어떠한 질문을 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혹여 자신에게 어려운 질문이라도 했다가는 “주 베 트 프라페!Je vais te frapper!."(널 때려주겠어.)라며 엄포를 놓았다.


    발표 날 칠판 앞에 선 레베카는 소위 하의실종 패션을 하고 있었는데, 셔츠 아래로 드러난, 레깅스 입은 그녀의 다리는 완연히 떨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거의 자료를 읽다시피 해버렸다. 자료는 참조하되 읽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녀가 보여준 연약한 모습은 이기적인 말이지만, 내게 안도감을 주었다.


    나의 발표 직전 월요일에는 키다리 조쉬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 전 주 식당에서 조쉬는 말했다. “내가 실수하고 만 거야. 월요일에는 대학원생들 참관도 있는데....월요일 아침부터 내가 프랑스어로 말해야 하다니!” 

    그렇다. 발표 자체가 스트레스인 데다가 월요일이면 모두의 입이 굳어 프랑스어가 잘 되어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 월요일, 조쉬라는 친구는 레베카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다시 한 번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가 점심시간 동안 허겁지겁 정리해서 프린트해 온 자료는 지나치게 간략했고 발표 시간이 되자 그 눈이 부리부리한 거인 같던 조쉬는 우리 앞에 서면서는, 떤 나머지 말이 굳어 딱딱해지고야 말았다. 그나마 마리 크리스틴이 달래주어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주제는 TEA(바스크 지역의 테러 집단 이야기)였는데, 그의 긴장한 나머지 결코 유창하지 않은 발표는 나를 다시금 안심시켰다. 그만큼 내 코가 석자였다.



    드디어 나의 발표일. 자료까지 미리 마쳐놓은 여유로움을 뽐내던 나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맞게 되었다. 그 전날 무시무시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머리 속에선 끝없이 누군가 프랑스 숙어와 표현들을 속삭이는 것 같았고, 중간에 수면제까지 한 알 삼켰지만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수면제란 잠이 깨주어야 할 시각쯤에 하염없이 더 졸리게 만든다는 거였다. 결국 나는 발표하는 바로 그 시간 동안 졸려 쓰러지고 싶을 만큼 피곤해져 버렸다. 









    발표는 대략 40분가량 걸렸다. 너무 졸리고 피곤한 탓에 준비했던 것보다 10%쯤은 못 미치는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완성도 높은 원고 덕에 발표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나는 프랑스와 한국의 현실을 비교한 다음, ‘사회가 어느 정도 자연을 재단한다.’는 전제하에 우리가 프랑스의 경우로부터 차용할 점으로서 계약PACS 형태 결혼의 합법화와 관련 복지의 확대 등을 강조하며 결론을 맺었다.


    남은 걱정은 질의응답. 질문이 쏟아지면 어떡하나 미리 걱정했지만 예상되는 우려의 인물 중 버지니아는 이날 따라 결석했고 이시도라는 중간에 늦게 들어와 한문 말末자를 어떻게 읽느냐는, 매우 간단한 질문만 했다.  


    그런가 하면 마리 크리스틴은 크게 만족하여 내게 박수를 보내라고 두 번이나 말했다. 친구들의 박수와, 저 맞은편에 앉은 슈네이드의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표정,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더니! 마리 크리스틴은 “이렇게 자료를 준비하려면 굉장히 정성을 들였을 텐데....”라고 노고를 치하하면서 또 한편 내가 어떻게 이런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사랑하고 같이 살고 아이를 낳는 행위는 자연 그 자체에 속하는 기본권인데 이 자연이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지 억압받게 되지 말았으면 했다, 가장 인간적인 기본 조건들에 대해 터부를 둘 때 사회 문화는 위선적이 된다, 사회구성원들의 자연적 욕구에 적응하여 팍스PACS제도를 만든 프랑스의 현실에 자극받았다고 답했다. 그녀는 자료도 주제도 발표도 너무 훌륭했다고 거듭 칭찬했다. 이후에도 수업 중에 같은 주제가 나오면 번번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수형의 졸리 엑스포제joli exposé(훌륭한 발표)에서 보았듯이....”



    그날 오후는 깃털 같은 기분으로 맞을 수 있었다. 할 일을 제대로 마친 후의 햇볕은 축복 그 자체였다. 이렇듯 시간의 강도와 밀도는 그것을 스쳐 가는 인간의 소일거리에 따라 바뀌는 조명과도 같다. 이날 오후, 마리나는 나의 발표가 어땠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케이트를 비롯한 친구들은 입을 모았다. “그녀가 하도 완벽하게 해서 우리는 질문할 것이 없었어요.”


    귀가해서는 문자 그대로 두 다리를 쭉 펴고 정말 잘 잤다. 온 힘을 다한 노동 후의 잠은 다디달다. 나중에 마리나를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 날 저녁 쏟아지게 잤다고 했더니 마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마치 곰이 겨울잠 자듯이?” 이렇게 해서 ‘이베르네’hiverner(겨울잠을 자다)라는 동사를 배웠다.



    발표 후의 학기는 긴장감이 감소되면서 내리막길처럼 편해진다. 발표 전 시간들은 처음 만난 친구들과의 서먹함과 발표 준비의 긴장감이 얽혀 지나갔지만 그 이후는 이미 친해진 친구들과 그저 오손도손하며 지낼 수 있었다. 학기 말까지 계속 이어지는 친구들의 발표들을 즐겨가면서 말이다.

이전 26화 서로 모른다는 느낌은 오히려 서로라는 잔을 가득 채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