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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May 16. 2019

프라다가 사랑한 예술가 '제임스 진'을 아시나요?

<제임스 진 끝없는 여정>전시회 in 롯데뮤지엄

I'm an alien wherever I go. Perhaps it's this sense of isolation that has driven me into making are in the first place. 난 어디를 가던 이방인이었다. 이 고립감은 내 예술의 기반이 되었다 - 제임스 진 -


프라다가 십 년동안 변치않고 사랑한 예술가 한 명이 있다. 바로 대만계 미국 아티스트 제임스 진(James Jean). 그의 국내 전시가 지난 4월 4일부터 롯데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미국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스스로를 '영원한 이방인'이라 칭하는 그가 만들어낸 예술의 공간. 어땠을까?


'제임스 딘'이 아니고.. 제임스 진?


사실 이 전시회를 예매할 때 나는 '제임스 진'을  제임스 '딘'으로 잘못 읽었다. 그래서 뮤지엄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내가 아는 반항적인 그 '제임스 딘'이 어떤 모습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을지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근데 막상 전시장을 들어서서 작가의 이름이 '제임스 진'인걸 보고 나의 어이없는 오해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전시회를 갈 때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사전에 가급적 전문가 칼럼이나 관람후기를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섣부른 선입관을 배제하고 오롯이 내가 가진 감성과 배경만으로 전시를 느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관람 후기나 기사는 전시회를 다녀온 후 읽어본다. 전시 정보를 사전에 찾아보지 않는 이런 나의 습관이 작은 오해를 낳았고 덕분에 '제임스 진'이란 예술가를 만나게 되어 지금은 아주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시작해 보겠다.




인생의 긴 여정 지금 우리는 어딜 향해 가고 있는가

입구에 놓인 대형 회화 '디센던츠-블루 우드'(2019). 소년들이 구름과 꽃으로 가득 찬 하늘을 떠다니는 모습...(중략)... "전시를 제안받은 뒤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했는데, 건물이 너무 높아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어요. 어릴 적 읽은 '잭과 콩나무' 동화가 생각났고, 구름 위를 떠다니는 소년의 이미지로 연결됐죠." <2019.4.3일 자 매일경제 기사 중>

압도적이다. '스케치에 몰두하는 그의 두 손'을 향해 일직선으로 쭉 뻗은 통로와 양쪽으로 배치된 푸른톤의 몽환적 그림. 입구에서 전시 메인 공간쪽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낯설지만 왠지 익숙한 고민을 가진 어느 예술가의 인생이 느껴졌다. 그의 인생에 드로잉이 가진 의미를 이 공간보다 더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영원한 이방인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누구나 이방인이기에 공감할 수 있다?


내가 '익숙한 고뇌'라고 쓴 건 바로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표현 때문이다. 그는 세 살 때 미국 뉴저지로 이주한 대만계 이민자다.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쓰지만 미국인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시아인도 아닌. 그냥 지구라는 행성이 고향인 아티스트? 미국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애매모호' 태생적 배경. 이런 환경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몽상가로 만들었고 드로잉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찾게 만든. 그럼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 부모님을 둔 내가 이 낯선 이방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바로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과 죽음이라는 운명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된다. 누구랑 같이 갈 수도 없는 오롯이 혼자만의 여정. 지구라는  우리 모두 태어나자마자  되는 운명.  과정에서 작가처럼 다양한 피부색과, 언어, 문화를 가진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그 속에서 비교적 느슨한 소속감을 가지고 느냐. 아니면 나처럼 하나의 민족이라는 강력한 동질성을 가진 그룹에서 끈끈하지만 때론 피곤스런 소속감을 가지고 가느냐 그 차이일 뿐. 그래서 우리는 결국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렇듯 인간이기에 느끼는 본질적 고립감과 거기에서 오는 고통을 그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표현했길래 비교적 어린 나이에(1979년생) 일러스트, 회화, 설치 미술, 영화, 패션 등 장르와 다양한 산업 분야를 넘나드는 초월적 예술펼치게 된 걸까.


초현실의 몽환적 바탕 그림죽음과 탄생,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을 녹여내


독특하고 신선하다. 그의 작품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몽환적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우리가 가진 현실의 적나라한 욕망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래서 특별하다.


최고의 이야기는 너무도 어둡고 비극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어둠을 예술로 승화시켜 소통할 수 있기에 그 결과물의 아름다움은 비극과 미를 넘나드는 극단적인 경험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 중 <화이트_타이거 메탈 white tiger metal>(2019)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미국 정부가 멕시코와의 불법이민 문제 해결을 위해 세우려는 국경 장벽이 이민자들을 가족분리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어미 백호가 새끼 호랑이들을 지키는 모습. 하지만 어미의 몸은 이미 조각조각 분리된 상태다. 용맹스러운 호랑이가 가진 본래의 강인함과 새끼들을 끝까지 지켜내려는 모성의 따뜻함, 그리고 분리된 몸이 보여주는 안타까움이 함께 공존하는 작품이다. 한국에서 열리는 전시에 전통적으로 상서로움의 상징인 백호를 모티브로 삼아 미국의 멕시코 국경 문제를 녹여낸 작가의 탁월함. 나만 그렇게 느낀 걸까.


프라다가 십년 동안 변함없이 사랑한 예술가


상업예술의 최정점에 위치한 패션 산업그가 가진 독특한 예술성결합. 그는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3번이나 패션 브랜드 '프라다'와 협업한다. 제임스 진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문양. 그 위에 표현된 초현실의 몽환적 세계는 프라다에 입혀져 우리 일상속으로 마침내 들어오게 된다. 

미국의 대표적 코믹북 <페이블스(Fables)>의 표지 100여 작업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제임스 진. 이후 대형 회화 작품, 영화 포스터, 피규어, 프라다와의 협업 등 그가 지금껏 시도한 도전과 소통의 방식은 무척 신선하. 예전 같으면 내가 착각한 '제임스 딘' 마냥 예술계의 '반항아'정도로만 치부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닌 듯하다. 가히 혁신적이다. 그리고 '믹스 앤 매치'의 새로운 콘텐츠 탄탄한 재능을 동시에 가진 요즘 시대가 원하는 진짜 예술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원한 이방인이기에 내겐 더욱 특별했다


그의 태생적 배경에 내가 자꾸 주목하는 이유는 예술 활동 전반에서 보이는 그의 행보가 이것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 때문이다. 영원한 이방인이기에 그는 동서양의 문화를 너무도 절묘하게 융합한 작품을 그려고,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주류 예술 그룹에서 다소 벗어난 이방인이기에 순수 회화의 주류와 비주류, 상업과 순수 예술 사이 단단한 벽을 가뿐하게 넘어버리시도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방인에게는 크든 작든 나름의 분야 또는 그룹이 가질 수 있는 '운명 같은' 편견과 고정관념 따위는 당연히 없을 테니까.


나는 11년 차 직업 공무원이다. 

발령 초기 민간 기업에서의 경력과 타고 난 성격 때문인지 '너는 공무원 같지 않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었다. 당시는 뭔 소리인가 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이해가 된다. 법령과 정해진 절차, 그리고 각종 규정에 따라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직업이기 민간에서 갓 들어온 내 모습이 더욱 그렇게 보일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얘기를 예전만큼 자주 듣지는 않는다. 이처럼 하나의 시스템에 오랫동안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배이는 습관과 인식들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말투에서 태도에서 옷차림에서 문자 메시지에서 심지어 음식을 주문하는 방식까지도 '~스러운' 느낌이 스며든다. 진짜 '공무원'되어가는 것이다. 더욱이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니편내편'으로 굳이 갈려야 뭔가 안정적?인 조직 나름의 분위기도 편견과 고정관념 목록을 다채롭게 채우는데   하고 있다.


그래서 제임스 진과 같은 예술가들이 가지는 '경계'를 모르는  자유분방함 이토록 좋은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내가 속한 시스템에 적응하고 편해지려 애쓰 모습에서 '적응하는구나'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 느끼는 이중적인 내 모습. 

굳이 감추고 싶진 않다. 자기 모습이 어느 한 곳에 고착화되는 걸 누군편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아닌 듯하다. 그래서 자꾸만 이런 공간에 내가 끌리는 . 내가 전시회를 찾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 오늘도 여지없이  예술가는 내가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공무원스러운, 여자스러운,  나이스러운 등등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깥세상으로 한 덩어리씩 끄집어 내게 한다.


그의 작품 역시 그 자신을 향하 있다, 결국 내가 답이다

You can see an aspect of my subconscious and inner desires through all the work 모든 작품에는 나의 잠재의식과 내면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그의 피규어 작품 전시.  두 작품이 있다. 슬픈 건지 편한 건지 모를 깊은 표정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아이와 또 한 명의 새총을 든 아이. 그러다 문득 새총 든 아이가 겨냥하는 건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아닌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기 자신임을 보았다. 자신을 겨냥하는 아이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결국 그의 작품들은 내면세계를 표출함과 동시에 스스로가 계속 깨어있위한 세상과의 교감이 아닐까. 그는 그의 방식으로 나는 나의 방식으로. 그렇게 우리는 각자 매 순간 세상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고 있다. 아니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가진 이중성. 상상속 유니콘을 계속 꺼내서 보고 싶은 이상과 환상의 세계. 그리고 끊임없이 감추고 싶은 적나라한 마음속 욕망의 세계. 이 두 세계주류에서 배제된 이방인의 시각으로 관찰하고 치열하게 사유한 결과를 캔버스 위에서든 영화포스터옷이든 가방이든 우리가 인식 가능한 다양한 공간에서 자유자재로 입히는 능력. 이걸 가졌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이 이토록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프라다는 운이 좋다. 누구보다 먼저 이걸 알아챈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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