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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Dec 19. 2021

두 번의 동거

M.Chat. 고양이 전시회 in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나의 20대 시절. 당시 나는 고향을 떠나 사무실 근처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까다롭고 외로움을 잘 느꼈던 나. 단지 ‘외롭다’는 이유였다. 어느 생일날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누구의 결정이었는지 사실 기억도 안 날 만큼 즉흥적인 선물이었다. 지금도 편한 성격은 아니지만 나의 20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맞추기 어려운 ‘세상 혼자 잘난’ 사람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들을 먹고 비슷하게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동거도 어려웠을 시기에 먹는 것도 생활패턴도 전혀 다른 생명체와의 첫 번째 동거는 어땠을까.


매일 아침 7시 일본어 수업을 가기위해 일찍 집을 나서고 야근을 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기를 반복했던 나는 사실 강아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지식도 전혀 없었다. 강아지를 받아들고 내가 가장 먼저 뛰어 간 곳은 동네 ‘애견숍’(지금은 ‘반려동물숍’)이었다. 거기서 추천하는 물품을 이것저것 사다놓고 필요한 최소한의 예방접종을 맞췄다. 그리고 집 안에서 내가 강아지에게 바란 건 단지 대소변만 잘 가려주는 것이었다. 강아지에게 산책이 필수라는 걸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퇴근을 하면 산책보다는 하루 종일 외로움과 관심에 목말랐을 그 어린 생명체의 대소변 교육에 매달렸다. 그래야 낮 동안 조금은 덜 어질러진 집안을 볼 수 있었으니까. 많이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그렇게 평일 낮에는 늘 혼자였고 주말에만 겨우 산책을 나갈 수 있었던 나와 함께 살던 작은 강아지 한 마리. 그 아이의 스트레스는 퇴근 후 집 안에 점점 더 많이 흩어져 있던 화장지 더미와 침대 모서리의 흠집만큼 쌓이고 또 쌓여만 간 게 아닐지. 

당시 20대 어두운 우울의 터널을 한참 지나고 있던 나에게. 그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물어뜯기와 울기밖에 었다. 작은 생명체의 외로움과 힘듦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른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택배 문자를 받고 급히 현관문을 열었다가 뒤쫓아 온 강아지가 잠깐 열린 문틈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택배상자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 아이를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잠깐 멍하게 서 있다가 “코카야!“하고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그만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회색의 높다란 계단을 짧은 발로 다급하게 뛰어 내려가는 강아지의 뒷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 아이의 마지막이다. 그 후 다시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휴대폰에 저장해둔 사진으로 전단지를 만들어 동네 여기저기 붙여봤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혹시나 다시 집을 찾아오지 않을까 기다렸지만 헛수고였다. 그렇게 나의 첫 반려동물과의 인연은 허무하게 끝났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내가 가장 아끼고 의지했던 친구가 어느 날 문자 한통 남기고 내 인생에서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나의 20대. 내가 인연을 맺었던 회사 동료들, 학교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그들에게도 나는 그 작은 강아지에게 그러했듯이 너무도 무심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닐까. 나만의 세계가 너무 강했기에. 바로 내 앞에 앉아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간절한 눈망울도 진심어린 마음도 보지 못했던 것 아닐까. 심지어 나로 인한 상처와 아픔까지도 말이다.


그 후로 나는 공공연하게 반려동물은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이라며 의식적으로 낯선 생명체와의 인연을 피해왔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생명체들을 마주치게 되었다.


2019년 4월의 어느 봄날.

"M.Chat. 고양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머금은 노오란 고양이들이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안녕! 와~너희들은 어느 별에서 왔니?”

긍정, 포용, 유머, 위트..뭐 도대체 없는 거 빼고 다 있다. 바로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M. Chat(Monsieur Chat 무슈 샤) 고양이 전>에서 만난 '긍정고양이'(프랑스어로 고양이는 '샤'(chat)')들이다. 꼭 외계에서 온 고양이 느낌이다. '안녕! 우린 너희 인간을 해치러 온 게 절대로 아니야. 이리 와'


“시크? 까칠? No! 우린 그냥 유쾌한 고양이예요”

여기 고양이들은 그냥 웃는다. 계속 웃기만 한다. 거기에 손 인사는 기본이고 장난스러운 포즈와 눈웃음, 윙크까지. 무엇보다 두 팔을 한껏 벌려 '아낌없이' 환영하는 그 모습에 나는 '유쾌함' 그 이상을 느꼈다. 낯선 생명체에서 이 정도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니.


“하이!”

딱 두 마디. 일상에서 우리는 이 짧은 인사말조차도 서먹하게 된 지 오래다. 20대 시절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작은 강아지에 대한 기억은 도대체 나에게서 뭘 빼앗아 간 걸까? 무슈 샤의 긍정고양이들이 내게 이토록 따뜻하게 다가온 이유는 그만큼 내가 '가벼운 유쾌함'들을 많이 잃어버린 결과가 아닐지.


길거리 낙서예술가에서 '무슈 샤(고양이 아저씨)'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라피티 아티스트 #토마 뷔유 (스위스 출생 1977~, 프랑스 파리에서 주로 활동). 그는 길거리 벽면의 엉뚱하고 상냥한 '천진난만' 고양이를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개념 찬' 긍정고양이로 잘 키워 낸 전형적인 성장형 작가다. 불법? 낙서로 감옥에도 가고 벌금도 내고 우여곡절 많았던 이력만큼 그의 '고양이'들은 단순한 유쾌함을 넘어 '그 이상'을 품고 있었다.


주말 아침 산책길에서(심지어 등산길에서도) 종종 마주치는 길고양이들은 낯도 가리고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한가득 내게 보낸다. 그러면서도 꽤 무심한 척한다. 어쩌면 우리의 자화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전시회를 온통 채운 긍정고양이들의 상냥한 웃음은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서글프기도 다. 그럼에도 20대 작은 강아지와 아쉽게 끝나버린 인연으로 반려동물에 대해 굳게 닫혀버린 나의 마음이 그 공간에서 조금은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이제 40대를 살고 있는 나는 누군가를 오랜만에 만나도 그 반가움의 작은 표현마저도 괜히 쑥스러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전시회에서 만난 긍정고양이들은 호기심 가득 하지만 선뜻 경계를 풀지 못한 나를 먼저 두 팔 벌려 안아주었다.


“안녕! 난 이제 좀 더 많이 웃고, 좀 더 많이 유쾌하기로 했어. 같이 할래?”

그렇게 유쾌한 긍정고양이들이 뛰어놀던 전시회를 다녀오고 3년이란 시간이 또 지났다.


오늘 점심시간 잠깐 시간을 내어 집을 들렀다. 아끼던 가죽 치마의 실밥이 다 터진 걸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같이 걷던 동료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화장실로 달려가 손부터 씻었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도 않은 손을 급하게 털어내며 화장실을 나오는 찰나. 내 방에서 뭔가 휙 튀어나온다. 그러고는 거실 한가운데 벌러덩 눕는다. 그리고 데굴데굴 구르기를 시작한다. 맑고 커다란 두 눈은 내 얼굴을 연신 살핀다.

그제야 나는 다가가서 턱을 다정하게 쓰다듬어 준다.


“안녕! OO아 잘 놀았어?”

온몸을 던진 작은 생명체의 인사에 답을 한 것이다. 우리 집에 온지 이제 2년이 다되어 가는 이 고양이의 인사법은 그 누구보다 정성스러운 것이다. 가끔씩 회사 일에 지쳐 저녁 늦게 현관문을 힘겹게 밀고 들어서다가도 이 아이의 반가운 구르기 기술에 나를 무겁게 누르는 피곤함은 어느새 날아가 버린다.


작년 초. 코로나19로 종일 집에서 지내야 하는 초등학생 아이가 몇 달을 조르고 졸라서 쉽지 않게 결정한 입양이었다. 얼굴의 절반을 커다란 두 눈망울이 모두 뒤덮은 줄무늬 회색의 작은 고양이 한 마리와의 동거는 나에게도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무모한 실험이었다. 무모했지만 그럼에도 포기는 없었다. 그리고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작고 여린 생명체가 ‘우리 집’이라는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각자의 역할을 다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생명체는 커진 몸집만큼 여유롭고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영역을 활보하며 나름의 일상을 즐기는 중이다.


나는 내 인생에 그리고 내가 사는 공간에 온몸이 털로 감싸인 생명체를 다시 들여놓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2년 전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긍정고양이들’의 유쾌함 덕분이었을까. 지금은 누구보다 즐겁고 유쾌하게 고양이 집사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전혀 다른 생명체와의 두 번째 동거는 나에게 말로 하는 대화를 넘어 온몸으로 표현하는 동물의 대화법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반갑다, 긍정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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