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
이름만 들어도, 그 단어만 보아도 나도 모르게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단어, "엄마"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의 가장 친구이자, 인생의 등대 같은 사람.
누구보다 나의 행복을 빌어주고, 나의 불행을 아파하는..
어떤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
그런 엄마가 아프다니.
항상 나보다 더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친다면서 "나는 괜찮아, 너나 잘 챙겨"라고 말하던 엄마가
그 무겁고 무서운 '암'이라는 단어와 함께 힘없이 누워있다는 사살이 우리 가족은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하셨다.
"내가 예순이 되면 인생의 한 사이클을 다 산 거야, 그 이후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살 거야, 좋은 일하고 베풀면서 그렇게 편하게."
12 간지가 한 바퀴 돌아 인생의 주기가 완성된다는, 그 말을 들을 땐 늘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무슨 소리야, 예순이 무슨 끝이야, 엄마 아직 한창 젊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런데, 정말 엄마가 예순이 되던 해 어디선가 어두운 그림자가 조용히 다가왔고 엄마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병마와 싸우게 되었다.
그때 생각했다.
정말 엄마가 무언갈 느꼈던 걸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된 걸까, 머릿속이 뒤엉켰다.
그렇지만 나는 좌절할 틈도 슬퍼할 틈도 없었다.
이 가정의 첫째 장녀이자 이미 멘탈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나의 동생은 내가 다독거려야 했고
엄마가 운영하고 계시던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알게 되면 불안해하고 회사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될까 봐
나는 아무에게도 표현하지도, 표현해서 안되었다.
오전부터 점심시간 까지는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동생과 바통터치를 하고
출근하는 길에서는 눈물바람으로 차에서 펑펑 울었지만 차에서 내리기 5분 전에는 눈물을 말끔히 닦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미소를 장착해야 했다.
글로 쓰면 몇 문장으로 요약되는 이 시간이 현실 속에서는 끝도 없는 어둠의 터널 같았고 가장 잔인했다.
그리고 이민,
그건 이제 내 인생에서 지워진 단어가 되었다.
남편은 이미 한국 회사에 사직서를 냈고, 영국 본사로의 이직이 확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 모든 걸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있었을까?
나는 한국에 남아야 했고,
결국 남편만 먼저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엄마의 딸이었고,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이기도 했다.
두 역할 사이에서, 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수많은 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마치 칼처럼 나를 찔렀고 답을 내릴수록 더 아팠다.
결국, 어느 날 밤 나는 남편 앞에 앉아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여보.. 이건 엄마도 나도 원치 않았던 일이지만 이렇게 일이 돼버렸고,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과 함께 영국에 갈 수는 없을 것 같아. 여보도 알지..?
힘들겠지만, 당신 혼자라도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생활하고 있어 줘."
"나도 많이 생각했어, 우리 이민..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나는 다시 한국 회사에 이야기해볼게.
그리고 어머니를 두고 너를 두고 내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이번 기회는.. 우리에게 아직 아닌 것 같아."
그 말에, 나는 오히려 눈물이 쏟아졌다.
고마움보다 먼저 몰려운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남편의 그 결정이 더 가슴을 저미게 했던 이유는 엄마와 남편의 관계가 단순한 사위와 장모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평소에 나보다 남편을 더 챙겼고 "우리 사위가 최고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부모에게도 잘하지 않던 애정을 엄마에게는 유독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엄마와의 대화는 늘 유쾌하고 어쩌면 전생에 두 사람은 모자 관계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록 사소한 취미도 철학도 성격도 심지어 혈액형도 같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엄마의 병은 단순히 장모님의 투병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 무너지는 일 이였을지도 모른다.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나는 더더욱 남편의 미래를 막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남편의 인생을 가로막는 느낌,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남편과 함께 엄마를 보러 댁으로 갔고 갑자기 남편은 엄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저희 그냥 한국에 남겠습니다. 곁에서 돌보게 해 주세요 제가 진짜 잘할게요
매일매일 밥도 제가 해올 수 있고 안마도 할 수 있고 혜원이도 잘 챙길게요 제발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남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고민도 없이 억지로 짜내는 웃음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어디 뭐 죽으러 가냐~ㅎㅎ 나 이겨낼 거야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냐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아서 잠시 쉬어가라고 그런 거야그리고,
너가 안가면 나는 오히려 더 아플꺼야 내 성격알지?
영국으로 먼저가서 멋~지게 자리 잡고 있으면 내가 금방 나아서 우리 사위가 있는 곳으로 행복하게 여행갈게.
난 그 생각만 하고 버티고 치료 잘 받을 거야 그러니 곧 우리 어머니가 오실 거다~생각하고 멋지게 자리 잡고 있어 알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 엄마는 병보다도,
자식들의 삶이 멈추는 걸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당신의 생명을 붙잡는 싸움 중에도,
우리를 놓아주는 용기를 내고 있었다는 걸...
그 자리에서 남편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는 두 말없이 조용히 짐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