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영국 땅을 밟다.
2023년 11월, 비행기는 부드럽게 런던 히드로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기장님의 착륙은 예술이었다.)
창밖에는 깜깜한 하늘과 가로등 불빛, 그리고 촘촘히 늘어선 집들이 보였다. 안전벨트 사인이 꺼지고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운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출국 전, 집에서 엄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순간이 떠올랐다. 회복 중이긴 했지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고, 그런 엄마를 두고 왔다는 죄책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 마음을 꾹 눌러 담은 채 비행기 밖으로 걸어 나오자, 영어로 된 표지판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welcome'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내가 영국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다.
7개월 먼저 영국으로 건너와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해 준 고마운 남편, 그리고 우리 집 강아지 천사를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심장 박동수가 올라갔다.
출국장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자마다의 개성으로 꾸민 푯말을 들고 웃으며 가족과 지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 그리고 반짝이는 하얀 포메라니안이 눈에 들어왔다.
웃으며 다가오는 남편과 강아지는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애써 슬픔을 감추고 끝까지 웃어 보이던 바로 엄마의 표정이 오버랩되면서 내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다.
내 초췌한 모습을 본 남편은 황급히 달려와 꽃다발을 건네고 살포시 안아주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너무 힘들었지? 허리는 아프지 않았어?? 고생했어, 그리고 와줘서 고마워.
몸은 피곤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간절했다.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하는 문 밖을 나서자마자 코끝에 닿는 공기는 습기와 낮은 온도가 뒤섞여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기온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낯섦과 긴장감 때문인지 더 차갑게 느껴졌다.
차에 오르기 전, 무심코 조수석 문을 열었는데 순간 멈칫했다. 운전대가 눈앞에 있었다.
'아... 영국은 운전석이 반대였지..."
이렇게 확연한 차이를 처음부터 마주하니 당황스러우면서도 피식 웃음이 났다.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 창밖 풍경은 한국과 또 달랐다. 노란색 번호판, 각양각색의 자동차들, 그 안의 사람들, 심지어 도로변의 나무들까지 낯설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이니 잠시 동안 지난 일들이 잊히고 풍경에만 몰입하게 된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남편이 웃으며 물었다.
"많이 다르지? 특히 도로가 다르지?? 이게 제일 큰 고속도로라는데 이 정도야. 그런 거 보면 한국이 도로나 인프라는 끝내주게 잘되어있는 것 같아."
남편의 말투를 보아하니, 정착 준비를 하며 이런저런 불편한 상황을 많이 겪은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여행객 모드라서 그런가, 지금은 눈에 닿는 것마다 새롭고 다 이뻐 보여."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신호등, 가로등, 형형색색의 차들, 도로 표지판, 빼곡히 들어선 집들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한국에서도 남편은 아파트를 좋아했고, 나는 정원이 있는 주택을 선호했다.
나는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와 클래식 가구, 열쇠 같은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했고, 남편은 최신 전자기기와 스마트키를 좋아했다. 이렇게 다른 두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영국살이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스쳤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아기자기한 한 영국의 주택 마을. 새로 지어진 동네라 집들이 정갈했고, 앞마당마다 각자의 취향이 담겨있었다.
마치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었다.
'아,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동네구나, 좋든 싫든 정을 붙여야 할 곳이구나.'
그 순간, 힘들었던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 같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스친 생각.
"어? 집이 왜 이렇게 춥지? 분명 온도를 올려놨다고 그랬는데....?'
한국 같으면 밖에서 칼바람을 맞고 들어와도 문만 열면 보일러 덕분에 훈훈한 공기가 반겨주고, 가방을 던지고 바닥에 몸을 붙이면 따뜻함이 온몸으로 퍼졌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집안 공기는 차갑고, 바닥은 완전히 냉골이었다. 마치 집이 "어서 와~ 영국 겨울은 처음이지?"하고 텃세를 부리는 듯했다.
몸을 좀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서 샤워를 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대충 짐을 풀고 필요한 옷가지와 화장품만 얼른 꺼내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틀자 따듯한 물이 쏟아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따듯한 물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게 아니라, 까끌까끌하고 뻑뻑했고 머리카락은 엉겨 붙어 내려가질 않았다.
당황한 나는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 동네 물... 석회수 인건 아는데, 너무 심한 거 아냐? 원래 그런거야 ??... 물이 왜 이래?"
남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 그래도 그게 걱정이었어. 여기가 석회수 등급 중에서도 'Very very hard water area'래.. 나도 그래서 그런지 없던 비듬 같은 석회수 가루가 떨어져서 출근해서 거울을 보면 어깨에 하얗게 내려앉아있더라구."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영국 생활 첫날밤의 세트 메뉴는 바로 '냉골 바닥 + 석회수 샤워'.
기본적인 의식주부터 삐걱대다니...
앞으로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