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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채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by 피넛버터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이 될 것 같다. 나이 마흔 중반에 그 어떤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이 그것도 완전히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을 10회에 걸쳐 연재해 보았다.


후회와 감사



어떤 날은 이렇게 늦은 나이에 왜 다시 직장인이 되어 낯선 IT용어들을 배우느라 고생하나 후회하기도 했고, 유치원 다니는 둘째 아이가 본인만 반에서 제일 늦게까지 종일반에 있어서 속상하다는 말을 며칠 연속으로 내뱉을 때면 그 후회는 두 배가 되었다. 어떤 날은 겨우 입사 6개월 만에 갑자기 내가 하는 일들이 지긋지긋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아마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처럼 대해야 하는 회사 생활에 대한 허무함을 알기에 드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들은 전 직장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미국계 회사였던 전 직장은 지금과는 달리 끊임없는 회의의 연속으로 심신이 지쳐있었을 뿐 아니라, 프로젝트의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야말로 매일이 지옥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회사는 (아직까지는) 아주 양반이다. 이런 회사라면 첫째와 둘째를 낳고도 경력단절 없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고용주의 입장


본인들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팀원으로 채용하자는 결정을 내린 부서장과 팀장, 그들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한 대다수의 서양국가에서야 겨우 두세 살 차이의 연장자가 팀원이건 아니건 전혀 관심사도 아니지만, 태어난 날 하루차이로도 동생의 신분이 되어 먼저 태어난 사람에게 반말을 들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또한, 40은 족히 넘은 중년 여성의 경우 자녀의 존재 여부가 아무래도 업무 스타일에 영향을 미칠 테니 그것도 내심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본인들과 코드가 잘 맞을지, 지난 회사는 왜 다니다 말았는지 등등의 의문이 이어졌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질문들은 요즘 멀쩡한 회사라면 절대 묻지 않을 질문들이라 차마 입밖에 꺼내지는 못했겠지.


지금 그들이 자신들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알 도리가 없다. 잘 못해도 잘하고 계시다며 빈말을 잘하는 사람들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뭔가 일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을 바꿔달라는 강한 클레임을 받은 적도 없다. 그냥 보통은 하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사항을 담아 지레 짐작해 본다.


외로움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업계 용어와 날다 긴다 하는 똑똑한 MZ로 가득한 IT 회사. 나는 회사 생활이 외롭지 않을까?


디폴트로 팀원들과 먹는 식사 외에는 개인적으로 불러 따로 같이 밥 먹을 사람도 한 명 없으며,

나이나 처지가 비슷한 워킹맘인 동료도 주변에 없으며,

같은 학교 출신도 없으며,

입사동기가 있어서 따로 DM으로 수다를 떠는 사람도 없으며,

혈연은 더더욱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외롭다는 마음이 든 적은 거의 없다. 사실 5살 터울의 아이 둘 키우며 회사 다니는 워킹맘은 '외롭다'는 단어의 정의조차 잊은 지 오래다. 누군가 열 나는 어른이나 아이 없이 무탈하게 학교, 학원, 유치원, 회사를 각자 다녀오고 저녁에 다시 조우하는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는 잠시도 쉴 틈 없이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한다. 그렇기에 혹여나 혼자라서 조금 쓸쓸하다는 기분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 참 매우 반갑다. 내 일상이 완벽하다는 의미다.


오히려 외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는 따로 있다. 바로 비엔지니어로서의 이질감이다. 팀 내에 나 빼고는 대부분 엔지니어들이라 (나도 엔지니어 경력이 있다면 있긴 하지만, 현재 보직은 아니기에) 서로 그들의 전문 용어로 뭔가 서로 질문하고, 도와주고,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나만 외인부대 소속이다. 아, 참고로 나는 테크니컬라이터다. 사내 제품 정보와 기술을 언어로 담아내고 이를 사람들과 효율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외롭다.


마무리


앞으로 5년을 이 똑똑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 나이 50이다. 그럼 또 무엇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 할지 뾰족한 계획도 없다. 그저 지금을 감사하자.

요즘 내가 좋아하는 말이 있다.

"매일 매일은 열심히 살되, 인생은 되는대로 살아라."

이렇게 좋은 회사에 이렇게 나이 많고 부족한 저를 입사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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