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만에 두바이에 돌아왔다.
내 무급휴가는 올해 말까지 연장된 상태였고, 비자 문제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전에 돌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6개월 이상 UAE를 떠나 있으면 자동으로 거주 비자가 캔슬된다고 하여 어쩔수없이 다녀와야만 했다.
무급 휴가를 나와있던 동기들은 이미 한 번씩 다녀왔고, 나는 6개월이 끝나는 막바지에 겨우 두바이에 입국 도장을 찍으러 오게 되었다.
짐을 싸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난 분명히 내 살림과 짐이 있는 내 집으로 가는 건데도, 속옷을 챙겼다가.. 칫솔을 챙겼다가..
다시 빼기를 반복했다.
집에 가는 건지 여행을 가는 건지 애매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두바이에 가져다 놓을 여름옷만 잔뜩 챙기고 캐리어를 닫았다.
다행히도 이번 출국길을 동기 한 명과 함께 동행하게 되어 오며 가며 느꼈을 싱숭생숭함은 덜하게 되었다.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왔다 갔다 했던 인천 공항.
이 곳 출국장은 거의 10개월 만에 온 듯하다.
출국장은 텅 비어있었고 그나마 탑승 수속을 하는 몇몇의 승객들도 거의 외국인들이었다.
체크인 카운터도 고작 3-4개만 열려있을 뿐 조용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그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나는 최저 시급을 받으며 카페에서 일했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힘들었을 소중한 일자리이긴 했지만, 가끔씩은 원래 내 자리가 그리워졌다.
아마 가끔 보다는 훨씬 잦은 빈도로 그리워했던 것 같다.
한국에는 5월 말에 도착했다.
초여름, 장마,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6개월의 시간 동안 여러 계절을 경험했다.
가장 불편했던 건 옷과 신발이었다.
두바이에는 고작 여름과 더 여름 정도의 계절밖에 없었으니.. 1년 내내 옷장에 같은 옷이 걸려있었고, 불편하지 않았다.
여름에는 편하게 신을 샌들, 장마철에는 비에 젖지 않는 슬리퍼를 저렴하게 샀다.
날씨가 쌀쌀해지고도 계속 샌들로 버텨오다가 늦가을이 되고 나서야 운동화를 하나 장만했다.
덕분에 멋을 내고 다니는 것은 포기하게 되었다.
9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두바이 국제공항 터미널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밟기 위해 공항을 걸어가는데, 6개월의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익숙했다.
-그냥 2주 휴가 다녀온 기분이야.
-맞아. 반년만에 돌아온 거 같지 않아.
집은 집인가 보다.
정말 익숙했다.
공항에서 일하는 인도 사람들, 필리핀 사람들 그 특유의 억양도 웃음이 날 정도로 금세 익숙해졌다.
입국 수속을 하는 특유의 거만하고 교양 없는 두바이 공무원들의 행동들까지 말이다.
항상 두바이 공항에 도착하면 했던 대로, 짐을 찾고 면세점에 들러 맥주를 샀다.
그리고 입국장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우리가 사는 동네로 가달라고 말했다.
공항에서 집까지 가는 길.
길이며, 표지판이며 모든 게 익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둘은 오랜만에 집에 간다는 기대로 약간 흥분된 상태였다.
엉망이 된 집안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집 건물에 들어서고, 오랜만에 보는 건물 경비원과 반갑게 인사를 했다.
무뚝뚝하지만 수줍음 많은 파키스탄 젊은 남자인데, 그 날은 본인도 우리가 반가웠는지 환하게 웃으며 여태 어디 다녀왔냐고 물었다.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두근두근한 기분.
과연 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자마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관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얼룩과 정체 불분명한 가루(?)들로 가득했다.
화장실도 마찬가지 도대체 어디서 떨어진 건지 모를 나무 찌꺼기 같은 가루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고,
부엌은 거미줄까지 쳐져 있었다.
집안 여기저기 보이는 곰팡이 까지..
은반지를 모아두었던 상자의 뚜껑을 열어두고 간 탓인지, 은반지는 모두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조금이라도 깨끗이 닦아 두지 않고, 이물질의 흔적이 있던 자리라면 진하게 얼룩이 생겼거나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장거리 새벽 비행이라 매우 피곤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쓸고 닦기 시작했다.
나에겐 2주처럼 느껴졌던 6개월이었는데, 집은 그 6개월이 진짜 6개월이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내 차의 배터리 역시 버티지 못하고 방전됐다.
지인이 한 달에 한번 정도 와서 배터리를 체크해주긴 했는데, 그 정도로는 무리였나 보다.
일주일간에 짧은 일정으로 두바이에 온 거라 다시 돌아가면 또 한 달은 그냥 둬야 하는데, 지금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잠깐 동안 고민했었다.
하지만 두바이에 있는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일정이 있었다.
여튼 차가 필요한 상황.
고민을 좀 했는데, 택시 타고 다니는 비용과 배터리 교체 비용을 비교해보더라도 교체하는 편이 더 나았기 때문에 배터리 업체에 전화를 걸어 출장을 요청했다.
배터리를 교체하고 시동이 걸리는 것을 보자 마음이 조금 안심되었다.
그다음엔 근처 주유소에 들어서 세차를 했다.
세차를 하고 나서 보니, 운전석을 제외한 좌석 창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휴..
정비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진단을 해보고 부품을 주문해야 한다고 했다.
일단 창문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입사 첫 해에 구입한 흰색 중고 소형차.
내가 원하던 연식과 모델의 차가 중고차 쇼룸에 나와있는 걸 보고 신나서 그 자리에서 계약했던 차다.
그 이후로 내 5년간의 두바이 생활을 함께 해준 소중한 내 차.
이렇게 망가져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짠했다.
집도 마찬가지다.
입사 후 3년 동안은 부엌과 욕실을 공유하는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다.
아무래도 비용 때문에 쉐어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지금 집은 3년 만에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독립하겠다고 결심하고 이사 온 집이다.
내가 사는 집은 원룸 형태의 스튜디오 아파트.
새로 생긴 건물이었지만 집이 조금 작게 나와서 저렴하게 입주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내 부엌과 욕실이 생긴다는 것에 어찌나 설렜는지 모른다.
두바이에는 이렇게 내 것.
처음부터 내가 만들어 놓은 내 것, 내 물건들이 많다.
이것들을 갖기 위해, 유지하게 위해 일을 했고 내 삶을 살았다.
돌아보니 자랑스러웠던 삶이었다.
이틀간 열심히 청소한 끝에 집은 점점 원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왠지 집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러워진 부분들 위주로만 열심히 닦았는데, 그냥 전체적으로 생기가 다시 올라 온 느낌이랄까.
앞으로 너무 오래 비워두지 말아야지.
이제 곧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와야 하는지, 두바이에서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올해 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더 이상 두바이에서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일상이 회복되고, 다시 예전처럼 여행할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니까.
나는 그렇게 믿으니까.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잠깐이라도 다시 승무원으로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실컷 떠나고, 돌아오고.
그랬던 거 다시 느껴보고 그 후에 마무리하고 싶다.
그냥 그런 날이 빨리 다시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