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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Oct 26. 2020

나의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줄게

대학에 가고 나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에는 연애와 사랑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나서 나의 몸과 마음으로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점점 혼자인 게 편하고, 혼자인 게 당연한 사람이 되어갔다. 어차피 오래 사귀지도 못할 거, 차라리 귀찮고 피곤하게 시작하지 말자는 마음이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실 고등학교 때 수술을 해서 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요. 아마 평생 낫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계속 다리를 절면서 걸어 다닐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라고 속 편하게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너무 어려웠다. 내가 저 물음에 가장 가깝게 간 것은 ‘예전에 수술을 해서 다리가 지금은 좀 불편해’라고 말한 것이었다. 이 불편함이, 이 후유증이 지속될 것이라는 것. 나를 만난다는 것은 아픈 나를 만난다는 것.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다리를 절어도 이런 나를 좋아한다는 것. 그런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상처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상처 받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이 호감과 동정을 구분하기 어려울까 봐 싫었다. 그래서 나는 내 주위에 선을 긋고 그 안으로 사람들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미팅으로, 소개팅으로 사람을 만나도 사귀지 못했다. 어쩌다 사귀게 돼도 오래 만나지 못했다. 내가 나의 후유증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때, 그때 그냥 헤어졌다. 말하는 것보단 보지 않는 게 나았다. 보지 않는 것이 더 힘들 정도로 마음이 커지기 전에 쉽게 다 정리됐다.

어느새 ‘넌 만나는 사람 생겼어?’라는 친구들의 질문은 ‘넌 아직도 애인 없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나는 친구들의 연애 대화에 끼지 못 해 느끼는 잠깐의 소외감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괜찮았다. 진심으로 괜찮았다. 그들의 걱정처럼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았다. 평생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친구는 언젠가 ‘너 이 추세대로면 독신으로 죽겠다’는 말을 남겼고, 나는 그의 말에 지극히 공감했다. 그는 아마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을 테지만, 나는 진심으로 독신으로 죽어도 괜찮았고, 평생 혼자여도 나 혼자 재밌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쉽게 지치는 내 몸이, 내 저는 다리가, 온갖 감각이 짝짝이로 뒤죽박죽 섞여서 느껴지는 내 몸이 어쩔 수 없는 ‘나’라는 사람의 특징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나자,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자신감을 가지고. 물론, 나의 몸과 수술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은 늘 어려웠다.

브라운 시쿼드 증후군의 증상 중 하나는 온도 감각을 짝짝이로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몸의 오른쪽 절반이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겨울에는 내가 좋아하던 애와 걷다가 ‘넌 왜 이렇게 추위를 안 타?’하는 질문에 내가 ‘난 수술을 해서 오른쪽 절반이 온도가 안 느껴져’하고 홧김에 말해버렸다. ‘온도에 둔감한 너는 추위를 잘 느끼지 못하니까 슈퍼맨이네’, 하던 내가 좋아하던 애의 반응은 내게 약간의 자신감을 심어줬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자신의 아픈 모습을 고백하면 나는 어떤 마음일까, 생각했다. 솔직해지자. 나는 어떤 마음일까. 실망할까, 아무렇지도 않을까, 더 애틋해질까, 더 좋아질까. 내가 어떤 마음이 될지 아무리 상상해보려고 해도 막상 나한테 닥친 일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었다.

내가 좋아하던 애한테 처음으로 내 짝짝이 몸에 대해서 얘기하고 나서 몇 년이 더 흐른 뒤, 나는 다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걔를 좋아하게 되면서 붙어 다닌 몇 달 동안이나 걔는 단 한 번도 나의 절뚝거림이나 뛰지 못함이나 자전거를 탐의 거부 등에 대해서 질문을 일절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나에 대한 배려라고 느껴져서 고맙기도 하면서도, 얘는 그게 궁금하지 않은지가 궁금했다. 걔랑 붙어 다니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난 그래도 대충 설명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예전에 고등학생 때 수술을 해서 몸이 약하다고 먼저 넌지시 언급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걔가 먼저 각을 잡고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바로 그 날이야. 오늘 우리의 대화 주제가 바로 네 몸이야. 오늘은 네가 네 얘기를 할 거야.”
나는 걔가 너무 확신에 차서 각을 잡고 말해서 거기에 약간 쫄았다. 그래서 일단 그 말을 듣자마자 노라고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노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오늘은 별 수 없이 얘한테 수술 얘기를 해줘야겠구나 싶은 약간은 무서운 직감이 들었다.


난 내 수술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약간씩 흘리는데, 다행히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숨이 차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숨을 약간 더 오버해서 몰아쉬면서 눈물 때문에 떨리는 목소리를 약간 숨길 수 있었고, 땀을 닦는 척하면서 눈물을 살짝씩 닦아낼 수 있었다. 내 얘기 초반엔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진 채로 내 말을 듣고만 있던 걔는 내가 얘기를 마치고 걔 쪽을 휙 쳐다보자 이렇게 말했다.
“너 정말 강한 사람이었구나. 비슷한 일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힘든 일을 겪었구나. 너 진짜 대단하다. 힘든 시간이었겠다. 이젠 내가 너를 돌봐줄게.”

그 얘기를 듣고 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걔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걔가 나한테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 직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손톱으로 내 살을 꾹 누르면서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해서 일부러 좁은 골목길로 가서 걔 앞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걔가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그리고 이마의 땀을 닦는 척하면서 계속 눈가를 꾹꾹 눌렀다. 해가 지고 있었지만 선글라스를 꺼내서 썼다. 선글라스를 꺼내서 쓰는데 걔가 내 손목을 툭 잡았다. 내 손목을 잡으면서 걔가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 다 괜찮아. 내가 너를 돌봐줄 거야.”

그 얘기를 하는 걔 얼굴을 쳐다보니까 걔도 조금 운 것 같았다. 걔 얼굴엔 눈물 자국이 있었다. 난 걔의 눈물을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걔한테 내 아팠던 기억들을 조금 꺼내서 보여주고 나자, 난 역시 걔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들키지 않으려고 꽁꽁 싸매 놓고 가슴에 숨겨놓고 있던 것을 둘둘 풀어서 하나하나 낱낱이 다 보여주고 나니까, 그 싸매 놨던 것들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어서 조금 가벼워진 듯 한 기분도 들었다. 잘한 것 같은데 실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나의 약점을 걔가 낱낱이 들여다봤는데도 부끄럽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걔가 그걸 들여다보고 조금 울어서 그랬을까. 난 그 눈물 자국에서 걔의 사랑을 조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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