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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 Oct 20. 2020

인생을 리셋하면

내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내린 답은, 인생을 리셋하고 싶어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가지 이유에서 그랬다. 첫째로, 인생을 리셋해버린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나는  이상 ‘ 아니게 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18  인생에  수술이 있었기에 22 우울했던 내가 있었고, 그때 우울했던 내가 있었기에 결국 지금  행복할  있는 내가 있는 .  사건을 겪은 나와 지금의 나를 분리할 수는 없다.  수술과 재활을 겪지 않은 나는 ‘ 아닌 사람이기에 그런 나를 상상하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결국 내겐 무의미한 질문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내가   없으니까.

그렇게 서서히 나는 ‘내가 만약 아프지 않았다면...?’ 대한 생각을 멈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럼과 동시에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수없이 던진 질문이었던, ‘ 굳이 내가 아파야 ? 나보다  잘난 사람도 많은데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하는 질문 또한 그만두게 되었다. ‘굳이 내가’, ‘하필 나에게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으니까. 이런 일이 ‘나에게일어났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수도 있겠다. 수술 없이는, 브라운 시쿼드 증후군 없이는, 다리를 절지 않고서는 온전한 내가 아니라고도 처음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했던 이런 생각들이 수술 이후 변한 나의 몸과 정신에 대한 진정한 받아들임의 시작이었던  같다.

둘째로, 만약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인생이 과연 행복했을까 생각해보면, 확실하게 그렇다고 답을 내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18 갑자기 삶이 잠깐 멈춰지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때까지 그랬듯이 조금도 쉬지 않고 평생을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렸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18 동안 그랬듯이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나의 가치를 느끼면서, 나의 행복이 아닌 비교를 통한 잠시뿐인 성취감에 도취돼서 살았을 것이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길을 아무 생각 없이 개미처럼 따라가면서, 무의미한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 1 하겠다고 사는 동안 정작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놓치고 있던 나는, 병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억지로  인생에 찍힌 쉼표로 인해서,   위해서 달리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나의 마음은 조금씩, 천천히 회복되었다. 우울했던 마음이 하루아침에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여전히 나는 우중충한 사람이었고,  자주 울기도 했다. 게다가 우울증이 회복된다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울증이 좋아졌다는 것은 우울감 속에서  기분을 끌어안고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가깝다. 나는 나의 우울 속에서 나를 포용하고, 그러면서 나를  5 동안 쫓아다니던 대상 없는 억울함과 분노를 조금은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술과 아픈 몸을 핑계로 하는 삶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쉬운 삶이었다. 물론 수술은 육체적으로도 아팠고, 재활은 정신적으로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탓하는 삶은 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피하는 것은 부딪히는 것보다 쉬운 선택이었다.

18 갑작스러운 수술과 입원이 그동안 달릴 줄만 알았던  인생에 찍힌  번째 쉼표였다면, 그렇게 나는 수술   5 만에    찍힌 인생의 쉼표 속에서  나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갈 연료를 채워 넣을  있었다. 연료. 그때 내게 필요했던 것은 내가 다시 행복해질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수술 이후 내가 아프기 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돌아가는 것에 집착했던 까닭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행복해질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 다리를 절지 않고 걷는 것은  행복을 위한 일차적인 필요조건이었다. 그래서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기 전에는 아무리 다른 것들을 성취해도  행복이 완전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픈 나의 모습조차 ‘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뒤로는 달랐다. 겉보기에 멀쩡한 ,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걷지 않는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일 필요가 없었다. 그건 그냥 나를 정의하는 수많은 것들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그게 나의 행복을 좌우하면  됐다.

언젠가부터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다시 행복해질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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