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는 감정, 머무는 아름다움

by 선율

“반면 인간의 흔적이 남은 것들을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오래간다.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이 올라간 위대한 역사 유적지는 물론이고, 낯선 골목에서 마주한 식당, 길에서 듣던 악사의 연주,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마주했던 미술관… 이런 것들은 불현듯 생각나고 또 다시 가고 싶다. 인간의 흔적이 남은 아름다움은 다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손이 닿은 결과물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우선 기억이 오래 간다. 다른 감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감동의 정체를 알게 되면 인간이 최종적으로 추구하게 될 욕망이 ‘예술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인간이 만든 미술, 건축, 음악 등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든다.”
– 『심미안 수업』, 윤광준


살면서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어떤 장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는, 아주 오래된 장면 하나가 마음속에 선명히 그려지는 때. 거창한 유적지도 아니고,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곳도 아니건만, 그 자리에 흐르던 공기, 사람들, 그리고 작고 정겨운 풍경이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 그곳엔 늘 인간의 흔적이 있었다.


나는 여행지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보다, 낯선 동네의 오래된 책방에 들어섰을 때 더 깊은 감동을 느끼곤 한다. 바다는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익숙하고도 완벽한 그 아름다움은 너무 완성되어 있어 나의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들은 불완전하고 어딘가 어설프다. 책방의 낡은 나무 서가, 종이 냄새가 배인 책들, 주인의 손글씨로 쓰인 추천 문구, 이 모든 것들은 나의 감각을 흔든다. 그 흔들림은 오래 남고, 나는 때때로 그 서점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그리워한다.


자연은 우리를 감탄하게 하지만, 인간은 우리를 감동하게 만든다. 오래된 벽화 앞에서 느꼈던 찌릿한 감정, 한 골목에서 들려오던 기타 선율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던 순간. 그것은 단순한 ‘예쁨’이나 ‘웅장함’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손길, 의도, 열정, 그리고 삶의 흔적 때문이었다.


예술이 그렇다.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은 감정의 여운을 남긴다. 감동은 머물다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감정을 깨우고, 우리의 기억 깊숙한 곳에 뿌리내린다. 그런 감동은 삶의 어떤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예술을 대하는 태도, 감각을 열어두는 방식, 그리고 일상에서의 사소한 선택들까지.


이런 감정은 단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존재가 가진 본질에 대한 존중이고, 우리가 결국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자각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욕망’이라는 윤광준 작가의 말은 그래서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손이 닿은 풍경,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문 공간, 그런 장면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다.


나는 인간의 흔적이 남은 공간을 좋아한다. 그것이 잘 정돈된 미술관이든, 허름한 벽돌집이든, 혹은 오래된 다리 하나든. 그 안에 살아 있는 감정과 이야기, 숨결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런 자리를 찾아 걷는다. 내 삶의 감동이, 누군가의 흔적에서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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