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오늘도

by 선율

“옛날에는 모든 할머니들이 그랬다. 쪼그려 앉아 주름진 양손에 고이고이 찻잔을 감싸 들고 조심스레 차를 홀짝였다. 눈 앞에서 제비가 날아가건 장맛비가 내리건 고양이 같은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관계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한 녹차를 멍하니 마시고 있을 뿐이다.”
— 사노 요코, 『사는게 뭐라고』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차를 마시는 시간이 길어졌다. 별 생각 없이 물을 끓이고, 작은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우러나는 시간을 기다린다. 어쩌면 이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나는 세상과 약속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여백을 찾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들의 삶이 그랬을까. 세상의 소란이 거리를 넘어 안방까지 밀려오던 시절에도, 그들은 찻잔 하나에 마음을 담고 조용히 시간을 건넜다.


예전에는 그 모습이 마냥 멀게만 느껴졌다. 왜 저렇게 느릿하게 움직일까, 왜 저토록 조용할까. 하지만 지금은 안다. 조용함이란 침묵이 아니라 내면의 파문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바쁜 하루를 살아낸 끝에 남는 고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어루만진다. 녹차의 쓴맛과 향은 그저 차의 맛이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 스며든 감정과 기억의 맛이다.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리움도, 후회도, 묵은 걱정도 한 모금씩 삼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 일부가 되어 서서히 내려앉는다. 살아가는 일은 매일을 완벽하게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내 삶의 중심이 된다.

사노 요코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한 녹차를 멍하니 마시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이 내 마음 한가운데를 툭 건드렸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어쩌다 나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마치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든 패턴처럼,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듯하다.


오늘도 나는 찻잔을 들고 있다. 쪼그려 앉진 않지만, 눈길은 먼 곳을 향한다. 대단한 의미를 찾지 않아도 좋다. 거창한 목표도 필요 없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게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는 연습이 삶을 조금 더 견디게 해준다.


바삐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가끔 멈춰 서야 한다. 그 멈춤이 주는 여유 속에서 삶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는 이제 안다. 그저 그렇게, 오늘도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이 얼마나 깊은 위로가 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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