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 살길을 찾아서
From 1919 to 2022
숙희는 천재가 분명했다. 순이는 영국으로 와서 3년이 넘어서야 들리고 5년이 지나고서야 틔였다는 영어를, 숙희는 언제 배웠는지 교수들조차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며 놀랐다. 지수는 숙희가 천재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놀라지 않았지만, 정작 지수는 영어가 힘들었다. 일상 대화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강의실 교수의 이야기는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고 어쩌다 질문이라도 할 참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로저는 뉴욕에서 온 영문학과 교환교수였다. 지수는 그날도 식은땀을 흘리며 로저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날의 강의는 카뮈의 이방인에 관한 것이었는데, 로저는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라는 ‘이방인’의 구절을 인용하며 인간의 고독에 관해서 열심히 강의했지만, 지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지수는 로저의 강의가 카뮈가 정의한 고독이라는 관념에 관한 것이라는 정도는 알아 들었고, 지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니가 아니? 카뮈는 정말 안다냐?. 니들이 고독을 알아?’ 이랬지만, 표정은 관리했다. 아니 지수는 표정을 관리했다고 생각했다. 강의가 끝나고 지수가 강의실 문을 나서려고 하자 로저가 지수를 불렀다.
“지수 학생! 이름이 지수 맞지요? 나 좀 봅시다”
지수는 지은 죄 없는 불쌍한 양처럼 로저 앞에 섰고, 로저는 그런 지수에게 알듯 모를 듯 한 표정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까 ~ 강의 중에 엄청나게 불타는 적개심으로 날 쳐다보던데 내가 뭘 잘못 말했나요, 나와 카뮈에 대한 견해가 다른가요?”
“아 ~ 그런 게 아니고요 ~”
지수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지수는 꼭 뭘 훔치다 들킨 것처럼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수 ~ 말해 보세요. 내 말 다 알아듣지요? 아까 그 눈빛은 내 강의를 모르고는 그런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요. 나 쿨한 사람입니다. 지수 학생의 견해를 듣고 싶어서 그래요”
지수는 지은 죄가 있는지 없는지 로저 앞에 있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벅벅 긁고 있다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자식한테 왜 이리 비굴하게 이러는 거지? 지가 진짜 알아? 고독이 뭔지 진짜 알아?’ 지수는 고개를 들고 로저를 빤히 쳐다보았다.
“교수님! 교수님은 ‘고독’를 알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수의 큰 눈이 더 커지고 로저를 뚫어질듯 바라보니 이번엔 로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뭐 ~ 음 ~ 그런 거를 얘기 하자는 거지요”
“네 ~ 네 ~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강의에서 뵙지요”
지수는 쌩소리 나게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강의실을 나왔다. 강의실을 나오자 지수의 가슴은 쿵덕쿵덕 뛰었고, ‘내가 지금 교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하며 돌아와 숙희와 순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깔깔깔 ~ 그래서 영문학 교수한테 니가 고독을 아냐며 쏘아붙였다고 푸하하하 ~”
순이는 우스워 죽겠다고 배를 잡고 뒤집어졌다.
“아이 참 ~ 언니 그러니까 어쩌냐고 나 서울로 돌아가야 하냐고 ~ 다음 강의가 낼모렌데 그놈을 어찌 보지?”
“뭘 어째! 당당하게 하는 거지. 동양인이나 이방인이나 여기선 그게 그거지 지가 ‘F’ 밖에 더 뭘 하겠어. 겁먹지 말고 당당하게 아까처럼 하는 거야 또 알아? 그놈이 진짜 '고독'이 뭔지 모를 수도 있잖아?”
이번엔 숙희가 웃겨 죽는다며 뒤집어졌다.
“둘 다 똑같네 똑같아 ~ 완전히 배 째라 여사님들이구만 ~”
“근데 숙희 너는 학교생활 어떻게 하니 교수들 말 잘 알아듣냐?”
“나? 난 그냥 책을 통째로 외워버려 히히히 ~”
며칠 뒤 로저는 지수를 교수실로 불렀다. 끝내 지수의 ‘고독’에 관한 의견을 듣고야 말겠다는 것이었다. 젊은 동양인 여자의 당돌함에 대한 로저의 복수였다. 지수는 로저의 호출에 숙희와 순이를 대동했다. 영어도 안 되는데 겁먹은 고양이처럼 로저 앞에 서긴 싫었다. 세 여자가 로저의 방으로 들어오자 로저는 놀랐지만, 곧바로 ‘흠 ~ 이제 떼로 몰려왔다 이거지 ~ 어디 한번 해보라지’ 하면서 씽끗 웃었다. 네 사람이 로저의 방에서 둥그렇게 마주 보고 앉았다.
“아 ~ 그래요. 오늘은 지수의 ‘고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물론 나의 견해도 밝히지요. 일전에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라는 카뮈의 의견에 무척이나 인상 깊은 표정을 하던데요”
지수는 로저의 말에 침을 꼴딱 삼키며 생각했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끝장을 보자. 그렇게 아는 척을 하니 어디까지 아는지 들어나 보자’ 지수가 숨을 들어 마시고 숙희와 순이를 보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내 말을 잘 번역해 줘요. 숙희도 내 말을 잘 요약해서 언니한테 말해줘”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지수가 고개를 내려 숙희를 보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어?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던데 그럼 마음이 폐에 있는 거야? 아니면 심장이 아픈 통증이야? 도대체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거야. 머리야 가슴이야? 어디에 있는 통증이 사람을 그리 아프게 하는데?”
“그리고 어떤 이는 고독이 자발적 외로움이라고도 하던데, 고독은 우선 자발적인 든 타발적이든 아무런 이유 없이 곧바로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야. 긴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을 모두 거쳐야 그 길고 긴 통증 끝에 기어코 오고 마는 것이지”
“고통이 하루 종일 계속되지는 않아. 머리든 몸이든 고통이 계속되면 그냥 몸이 알아서 쉬어. 그러면 기절하듯이 잠이 들기도 하지. 그런데 아주 잠깐만 틈이 생기면 다시 찾아와 그래서 악몽을 꾸는 거야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거지”
“그 고통 끝에는 깊은 외로움이 있어.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시간과 공간이 휘어지는 것 같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고 관심도 없지. 그냥 혼자 있는 거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런데 그 속에 슬픔이 있어. 이게 웃긴 게 그 슬픔이란 게 완전히 혼자 놀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가도 갑자기 훅하고 올라와. 어디서부터 인지는 모르겠는데 몸속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갑자기 홍수처럼 밀려와 그러면 웃다가도 눈물이 나. 입은 웃고 떠들고 있는데 눈이 울고 있는 거야”
“그런데도 더 웃긴 건 그 순간 몸이 그걸 이해하고 있는 거야. 아 ~ 지금 웃고 있지만 울고 있구나 또 찾아왔구나 하면서 말이지. 그게 다 지나가야 고독이 와! 고독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슬프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지만 절대로 남과는 공유할 수 없어”
“슬픔은 위로받으면 잠시라도 나아져. 고통도 신기하게도 약 먹으면 잠깐이라도 좋아져. 외로움은 좋은 사람과 같이 있으면 그 시간만큼은 즐겁고 행복해지기도 해. 그런데 고독은 어떤 방법으로도 남과 같이 할 수가 없어. 어떻게 줄여볼 방법도 없어. 그냥 그게 일단 오면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아”
“난 고독이 뭔지는 몰라.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고독’이 아닐 수도 있지. 아무튼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거대한 고독뿐’이라는 카뮈의 그 거창한 말은 못 알아듣겠어. 내가 그걸 모르겠다고 하면 카뮈를 모독하는 거야?”
숙희와 순이는 결코 짧지 않은 지수의 말을 듣고 한 참을 생각하더니 ‘야! 이건 도저히 ~ 못 전하겠다. 이건 뭐 어려워서 정리도 못하겠어 ~ ’고 하면서 울듯한 표정으로 지수와 로저를 번갈아보았다. 그런데 뜻밖에 로저는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을 지수의 한국말을 듣고, 지수의 눈을 뚫어질 듯 보더니 잠시 뒤 이렇게 말했다.
“지수의 사랑은 아름답군요”
“그놈은 박사가 맞아! 박사가 왜 박사겠니. 척보고 알잖아. 눈빛만으로 그걸 알아내니 그게 박사지 뭐겠어”
로저를 만나고 순이가 한 말이었다. 그 뒤 지수와 로저는 꽤 친해졌다. 리포트를 낼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지수에게 로저는 짜증 내지 않고 그저 웃어주었다. 지수는 밝았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어린 수진의 생각에 때마다 그늘졌고,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야 할지 몰라 늘 무거웠다.
“지수! 학기 끝나면 뉴욕에 한번 가자. 나도 이번에 뉴욕으로 돌아가는데 거기서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로저는 지수보다 열 살이 많았다. 지수가 어려 보여 자기가 아빠 같다며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로저가 나이보다 늙어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로저는 지수에게 늘 이런저런 잔소리를 많이 했고, 지수는 뭔 상관이냐며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어느 때부턴가 로저가 오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로저는 지수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지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지수의 뒷모습은 가려지지 않았다.
어느 날 로저는 뉴욕에 있는 한국인 제자로부터 안부를 묻는 메일을 읽다가 갑자기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 제자는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한다고 했는데, 로저는 지수와 연결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기로는 한국영화가 막 부흥하고 있어서 미래도 밝고 무엇보다 지수가 일반 회사에 취업하기는 나이도 있었고, 성격에도 맞지 않아 보여서 걱정이었는데, 영화 쪽 일은 여러모로 어울리겠다 싶었다. 게다가 로저의 인맥으로 도울 수도 있으니 그것이 더 좋았다.
“지수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잘 모르겠어요. 마땅히 잡히는 일도 없고~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그래서 말인데 ~ 뉴욕에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제자가 있어.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는데, 똑똑한 친구야. 사람도 괜찮고. 학기 끝나면 뉴욕에 가보자. 그 사람 소개해 줄게. 내가 이것저것 말해 놓았으니 지수를 위해서 준비해 놓을 게 있을 거야”
“영화라고?”
숙희와 순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숙희가 먼저 말했다.
“좋은 생각이다. 내가 직장 다녀봐서 알고, 지수 너도 아는데 사실 우리 나이에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또 지수 성격에 샐러리맨이 맞지도 않은 것 같아. 그렇다고 덥석 장사를 할 수도 없잖아. 그런데 영화 쪽 일이라고 하니까. 이것저것 우리한테 맞아 보이네. 로저가 뉴욕까지 가서 도와준다고 하는데 얼토당토 하기야 하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로저가 그렇게까지 하는데 허무맹랑이야 하겠니. 야 ~ 영국에 오자마자 여자 혼자 차끌고 여행도 가고, 교수랑 맛짱도 떴는데 그깟 걸 못하겠어. 내가 제임스 꼬셔서 투자자 모아 줄게, 숙희가 한국은행에 있는데 설마 돈이 없겠냐?”
“깔깔깔 ~ 아무튼 언니는 참 ~ 하여간 못 말려 ~ ”
그 낯선 땅에서 세 여자의 웃음이 1999번째 지구의 어느 겨울밤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