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 밀레니엄
From 1919 to 2022
서기 2000년이 되면 갖가지 이유로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종말론자들은 예언했다. 심지어는 언론에서 조차도 2000년이 되면 이런저런 사회망 시스템의 큰 혼란이 있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1999년 23:59초가 지나고 2000년 00:00시가 되는 그 순간 지구의 모든 사람들은 2000년이 되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2000년 1월 1일은 1999년 12월 31일의 그다음 날 일 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21세기의 도래에 한결같이 기대에 부풀었다. 100년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100년이 시작된다는 기대였다. 많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 있었지만 세상은 그 보다 더 빠르게 변했고, 21세기는 그 서막에서부터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인류의 변화를 예고했다.
“한국 영화는 충무로 영화가 있고 독립영화가 있어요. 충무로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라고 생각하면 되고요. 독립영화는 뭐 단편영화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다큐도 그 중 하나지요. 한마디로 돈 되는 영화판이 있고 돈 안 되는 영화판이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효근은 지수보다 몇 살 많았고, 로저는 그의 지도교수였다. 효근은 로저의 부탁을 받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며칠 생각해 보니 로저 교수의 부탁은 단순했다. ‘지수가 한국에서 영화 쪽 일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로저의 부탁은 뜬금없었으나, 효근에게 로저의 부탁은 지도교수의 눈에 띌 수 있는 기회였다.
효근은 뉴욕에서 로저를 따라온 지수를 보고, 아이가 있는 삼십 대 중반의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 동안이라서 약간 놀랐다. 처음에는 로저도 있고 해서 영어로 대화하다가 로저가 답답해 보였는지 둘이서 한국말로 하라며 먼저 자리를 떴다.
“교수님 부탁은 한국에서 지수 씨가 영화 쪽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건데, 지수 씨는 영화는 좋아하세요?”
“네 ~ 많이 좋아해요. 개봉되는 영화는 거의 보는 편이죠”
“음 ~ 그렇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국영화는 아무튼 그렇게 두 부류예요. 그런데 충무로 영화는 규모도 크고 시스템이 많이 복잡해요. 지금 충무로에는 투자 열풍이 일기도 하는데 그만큼 리스크도 크지요. 그래서 말인데, 지수 씨 ‘부산국제영화제’라고 아시죠?”
“네 알고 있어요”
“그게 사연이 좀 긴데, 어쨌든 한국영화는 부국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영화 시장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보통 독립영화라고 하면 운동권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활동하거나 아니면 충무로를 꿈꾸는 감독들이 단편영화로 습작을 만드는 정도였는데, 부국 이후에 우리도 독립영화가 제도권으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죠. 제 전공이기도 해요. 지수 씨도 사회학 쪽 전공이라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신방과예요. 영국에서도 학위과정은 아니지만 그쪽으로 공부했고요”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독립영화 배급사를 한 번해보세요. 여기도 바닥이라는 게 있어서 충무로 판에는 지수 씨의 나이나 경력으로 봐서 중간에 끼기는 좀 어려워요”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막 독립영화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어서 제작도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공급망 시스템은 막 만들어지는 과정이거든요. 그래서 문화부나 여러 기관에서 지원제도가 좀 많아요. 뭐 큰돈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잘 만하면 어렵게 직장을 구하는 것보다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수 씨는 대학 인맥도 도움이 될 테고, 로저 교수가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쪽으로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로저 교수의 이름도 도움이 될 겁니다. 저도 한국에서 그쪽 분야로 활동하고 있어서 조금은 도움이 될 테고, 시작하는데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군요. 어쨌든 그리 생각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독립영화 배급이라는 게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 영화를 파는 사람이 있는 건데, 한 마디로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찾아서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그 판권으로 영화관에 배급해서 상영이 되도록 하는 거지요.
“근데 그게 돈벌이가 돼요?”
“하하하 ~ 역시 로저 교수님 말마따나 시원시원하시네요. 돈이 안돼요. 그래서 나라에서 지원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지원금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지요. 그런데도 있어야 하니까 지원하는 겁니다. 그 돈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아라 이거지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닌데, 생각해 보면 지수 씨는 그쪽으로 꽤나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도 지수 씨 학교나 학과의 인맥도 많이 도움이 될 겁니다. 학교 친구들 중에 기자들 많지요?”
“네 그런 편이지요”
“독립영화라는 게 어떻게든 사회적 이슈에 선봉에 있는 거라서 기자들의 도움이 크거든요. 그만큼 관심을 받으면 지원도 잘 되고요. 결국 지원을 잘 받으면 제작이나 배급도 그만큼 원활하게 되는 거지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게 뭐 말처럼 그렇게 쉽기야 하겠어요. 이 일도 결국 어려우니까 남아 있는 거겠죠. 하지만 일하는 보람은 있을 거예요.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영화 쪽 작은 사업으로는 전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지수 씨에게는 주변에 그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운도 있는 것 같고요”
효근을 만난 후 로저는 지수의 말을 듣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지수 ~ 한국영화뿐 아니라 여기 미국이나 유럽에도 모두 독립영화가 있어. 결국 독립영화는 상업영화의 뿌리인거야. 그래서 영화산업이 당장은 돈이 안 되는 독립영화를 지원하는 거지. 한 번 해봐!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 볼게”
지수의 눈 멀리서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그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이제는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길목에 섰다. 원하지도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무슨 일을 하던 이보다 덜 위험할 수 없었고, 이보다 덜 생소할 일도 없었으며, 이보다 덜 무모하지도 않았다.
‘그래 하자! 해보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고 더 갈 곳도 없으니 가다 보면 길이 있거나 아니면 길이 되겠지. 여보! 지켜보고 있지? 나 잘하는 거지? 나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