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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Mar 13. 2019

달의 선물

달빛에 고양이라니요.

  달을 꼭 봐야 하는 날이라며 온통 떠들썩했다. 슈퍼 블루문에 개기월식까지 겹쳐 핏빛으로 물든 달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일에는 누구보다 설레어하던 내가 그날은 덤덤했다.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조차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서 뒹굴뒹굴, 새벽 1시가 돼 가는 시간까지 깨 있었는데 가만히 누워있다가 갑자기 달이 보고 싶어 졌다. 환상적인 우주쇼라고 칭하던데, 벌써 그 쇼는 다 끝났겠지. 달이 보이기나 할까 반신반의했지만 새벽 공기라도 맡을 겸 현관문을 나섰다.


  문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문 앞에 서서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주택 건물들 사이로 크고 환한 달이 떠있었다.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크고 가까울 뿐이었다. 이 시간대에 달은 여기, 바로 우리 집 위에 있구나. 그때, 한쪽 편에서 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차돼 있는 주인집 아저씨 차 위에 작은 동물의 쫑긋 선 두 귀의 실루엣이 보였다. 가만히 앉아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저렇게 굳어있나. 혹시나 싶어 “이리 와.” 하며 손짓을 했더니, 예상을 깨고 망설임 없이 차에서 뛰어내려 '도도도도' 산뜻한 발걸음으로 우리 집 계단을 올라왔다.


  처음엔 경계하는 듯했지만, 어디선가 배운 대로 눈을 맞추고 천천히 깜빡거리며 인사를 건네자 계단을 한 칸씩 한 칸씩 올라오더니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녀석의 모습이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드러났다. 등에 큼지막한 검은 무늬가 있었고 양 눈도 검은 무늬로 뒤덮여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노란 호박 보석처럼 빛났다. 코에도 귀여운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무늬를 제외한 털은 하얀색이었다. 완전히 커 버린 성묘도 아니고 작은 새끼도 아니었다. 그 중간쯤이랄까. 호기심도 많아 보였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는데,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몰랐다. 달을 보러 나와서 만났으니, 우선 ‘문(Moon)’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계단 밑으로 쪼르르 내려갔다가도, ‘문-’하고 부르면 다시 돌아왔다.


  쪼그려 앉아 손가락을 내밀자 킁킁 냄새를 맡더니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바라봤다. 눈이 또렷했다. 내가 손가락을 한 번 더 내밀자 이번에는 장난감 취급하듯 솜방망이 같은 작은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앉아있었다. 세상은 고요했고, 갑자기 나타난 문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느꼈다. 모두가 잠든 와중에 문과 나 둘만 깨어있는 것 같았다. 목이 마를까 싶어 물을 담아 내왔지만 마시지 않았다. 길고양이가 아니라 유기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에게 줄 수 있는 음식을 검색해보다가 집에 있는 참치 캔이 떠올랐다. 깨끗하게 물에 헹궈서 주면 괜찮다는 말에 집에 들어와 참치 캔을 뜯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물에 헹구다 싱크대에 흘려보낸 참치 덩어리가 적지 않았다. 불투명한 현관 유리문에 하얀 몸이 어른어른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을 살짝 열자 문의 궁금증 어린 얼굴이 바짝 붙어 있었다. 이 커다란 네모 안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표정. 참치를 앞에 놔주자 정말 하루 종일 굶은 아이처럼 잘 먹었다. 깨끗이 비워진 그릇을 집에 가져다 두려고 들어온 사이에도 문은 떠나지 않고 현관문 앞에 앉아있었다. 문을 살짝 열면 문의 귀여운 얼굴이 보였다. 조금만 더 열면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문의 몸짓이 갈팡질팡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지, 어쩌지. 오늘 밤만 집에서 재워줄까. 길고양이를 집에 들여도 되는 걸까. 오히려 무책임한 행동은 아닐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설레면서도 막막한 마음에 고민이 길어지는 사이, 문 앞에 앉아있던 문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급하게 문을 열어봤지만 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잠깐 모습을 감춘 걸까. 불러보기도 하고 기다려봤지만 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대로 보낸 것이 후회됐다. 노란 눈동자가 벌써 보고 싶었다. 문 앞에 와있을까 싶어 들락날락하기를 몇 번.


  그러다 문득 나 혼자만의 호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도 자신만의 집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잠깐 새벽 마실을 나왔다가 나를 우연히 만난 걸 수도 있고. 재미있게 놀고 잘 먹었으니,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건가. 나 혼자 오버했네. 하면서도 자그맣고 하얀 실루엣이 현관문에 어른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늦은 새벽까지도 문을 계속 열고 닫았다. 집 안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달의 크기만큼, 마음에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구멍을 스치며 결국 혼자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인연에 얽매이지 말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인생은 타이밍이라며,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한다. 둘 다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다. 뭐가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인연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는데,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에도 이렇게 큰 그림자를 남기는 게 인연인데 어떻게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새벽마다 문을 벌컥벌컥 열게 될지도 모르겠다.



  2018/2/2



우리 집에 찾아 온 손님 문(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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