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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Oct 22. 2019

누구나 어린 날의 기억을 묻어놓은 공간이 있다


  우리 집은 구멍가게를 했다. 강원도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해서 ‘강원도촌’이라고 불리는 수도권 치고는 꽤나 시골스러운 동네 초입에 있는 작은 가게였다. 강원도에서 올라온 젊은 엄마와 아빠의 보금자리였고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일터였다.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은 작은 가게 안을 무대로 삼고 시작된다. 두세 명의 손님이 들어오면 북적이는 아주 작은 가게였지만 없는 것 없이 다 팔았다. 손님은 동네 주민뿐이어서 누가 오든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안부 인사와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싹싹하고 밝은 엄마를 모두가 좋아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직도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것처럼 가게의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팔이 닿는 부분에 가죽이 살짝 벗겨진 주황색 소파와 수없이 열고 닫았던 회색 돈통, 구석에 진열된 라면들, 엄마가 가지런히 세워놓은 냉장고 속 음료수, 진열대 사이에 놓여있던 나의 자전거, 기하학적인 무늬의 천장, 가게 안에서 유리문 너머로 보이던 동네 초입 길목까지. 유독 나의 기억 속에 이 작은 가게가 선명한 것은 내가 이 공간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동안은 항상 내가 가게를 봐야 했다. 한창 밖에 나가서 뛰어놀길 좋아하던 나는 그게 참 고역이었고, 산과 논밭으로 쏘다니던 나에게 “너네 엄마가 너 찾아.”라는 동네 친구들의 말은 제일 무서운 소식이었다. 어떨 때는 엄마가 가게 앞에서 내 이름을 아주 크게 부를 때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동네 어느 구석에 있든 엄마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그럴 때는 신나게 놀다가도 친구들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가게로 향해야 했는데 괜히 심술이 나서 애꿎은 손님들에게 퉁명스럽게 거스름돈을 건네기도 했었다.


  마냥 싫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구멍가게 딸이라고 하면 부러워하지 않는 애들이 없었다. 군것질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더운 여름날에는 하루에 한 번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다. 빵에 들어있는 스티커를 모으는 것도 친구들보다 손쉬웠다. 가게를 보는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좋았고,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갔다.


  밤 11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았지만, 우리에게는 퇴근길이 따로 없었다. 가게 옆으로 난 나무 창살문을 옆으로 열면 바로 집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그 가게는 우리 집이기도 했다. 나무문을 열면 나오는 작은 방이 나의 방이었다.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비추면 방이 온통 주황색으로 차오르는 손바닥만 한 방이었다. 방이라기보다는 집으로 통하는 통로에 더 가까운 공간이었다. 그 작은방에 누워 매일 마음속으로 독립된 나의 방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멋진 아파트나 빌라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친구를 집에 데려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내가 중학교에 갈 때쯤 엄마는 가게 문을 닫았고, 번듯한 집 구조를 갖춘 빌라로 이사를 했지만, 그 어떤 집보다 구멍가게 집에 대한 향수는 진하게 남아있다.


  여름밤 가게 옆에 있던 평상에 드러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던 기억, 높지 않은 가게 지붕에 올라 혼자 시를 끼적이던 기억, 작은 동네를 모험하는 마음으로 뛰어다녔던 한낮의 열기, 가게에 딸린 작은 내 방에 엄마와 함께 누워있던 기억, 그때 들었던 자장가, 특이한 집 구조 때문에 상상력을 동원하던 숱한 밤들, 엄마와 아빠의 젊은 모습. 엄마의 생기 넘치고 아름다웠던 시절. 오히려 오래 지나 더 애틋해진 그때의 추억들. 가난했고 가끔은, 혹은 자주 불행했지만 지나고 보니 지금의 나를 만든 그때의 나날이다. 엄마 아빠의 치열했던 젊음이 그 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공간의 구석구석을 이미 다 커버린 내가 곱씹으며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된다. 이 모든 기억들과 그때의 작고 여린 마음이 그 작은 구멍가게 집에 봉인되어 있다.



어릴 적, 작은 구멍가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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