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떠나 있던 시간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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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여전히 회색 빛이 돌아요. 새하얀 형광등보다는 은은하고 따뜻한 햇빛이 좋다며 불을 끄고 커튼을 젖히던 당신이 떠오르는 하루예요. 이런 날씨에 그대는 어떻게 지낼까요?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지 이제 만 하루가 됐는데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기분이에요. 그나마 따뜻하고 화창하던 그곳과 얼어버린 이곳의 날씨가 다르기 때문일까요.
생각해보면, 내가 떠나 있던 시간만큼 이곳도 시간이 흘렀고, 내가 있던 자리는 내가 없는 시간을 보낸 거잖아요. 그만큼 멀어진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이것도 시차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열일 제쳐두고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쓰고 나면 이제 정말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요.
어제 집에 도착해서 바로 곯아떨어진 덕분에 느지막이 일어나 짐을 풀었어요. 여행이 참 묘한 게, 끝인 것 같은데 도무지 끝이 안 난단 말이죠. 공항으로 가는 길이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거죠. 집에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며 아, 이제 정말 끝이네. 했는데 짐을 풀다 보니 또 여행하는 기분인 거예요. 사진을 정리하면 또 그런 느낌이 들겠죠. 한동안은 이 기분을 즐겨야겠어요.
나는 내가 여행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런 걸 잘 못 느꼈어요. 오히려 내가 여행이랑은 잘 안 맞는 사람인 건가? 내가 이렇게 안온하고 게으르면서, 새로운 자극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인가 고민도 해봤어요. 그동안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만 너무 마음을 열어두었나 되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니면 아름다운 것을 보는 눈이 감퇴된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가까운 곳이라도 더 많이, 자주 다녀야겠다고요. 주렁주렁 짐 무겁게 달지 않고, 간편하게 챙겨서 떠나는 여행이요. 한 곳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은 그런 여행이요. 아무래도 저는 그런 쪽에 더 맞는 것 같아요. 여행에도 취향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모쪼록 그대에게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대가 좋아하는 따스한 햇살이 어서 찾아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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