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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야 Nov 01. 2019

멀어지는 틈에서도 꽃은 핀다

계절과 계절의 사이를 걷는 것처럼.



  블랙커피를 꾸역꾸역 다 마셨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심장이 유난히 크게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카페인이 몸속 구석구석 퍼졌고 두근거리는 심정을 어쩌지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손목뼈 마디가 모니터 불빛에 그늘져 도드라져 보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힘줄이 파닥거리는 것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괜스레 손등을 쓸어본다. 얇은 살갗의 감촉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손끝에 감각을 세우고 만져보니 새로운 감촉이다.


  평상시 자주 듣지 않던 음악을 듣고 있다. 그동안 하나씩 추가되어 수많은 곡이 쌓여있는 뒤죽박죽 엉터리 음악 목록이 랜덤으로 재생되고 있다.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준비되는 동안 몇 초의 정적이 흐른다. 그 틈에 ‘멀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떠한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것,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멀어지는 것, 감정의 역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소원해지고 소멸해가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미 멀어진 것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서운하고 아쉬운 감정이 뒤죽박죽 찾아오지만, 그 감정으로부터도 멀어진다. 어느새 잊고 또 다른 기억을 쌓아가고, 또다시 그 기억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살고 있다. 인생은 어쩌면 그런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온 길은 다시는 걸을 수 없다.


  하지만 멀어지는 틈에서도 꽃은 핀다. 멀어지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는 다시금 어딘가에 가까워지는 것. 기대감과 설렘이 꽃핀다. 듣고 있던 음악이 끝나도 곧 다음 곡이 재생되는 것처럼. 계절과 계절의 사이를 걷는 것처럼. 인연도 마찬가지다. 멀어지는 사이가 있다면 새롭게 다가오는 사이도 있다. 과거의 기억과는 멀어지지만, 내일의 나와는 가까워지고 있다. 자꾸만 새로운 것이 찾아오고, 나를 변하게 한다. 울었다면 웃게 하고, 웃었다면 울게 한다. 그런 변주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 오르내림 속에서 평온을 찾는 것. 그것만이 지금의 과제다.


  가끔은 굳이 멀어지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 속에서 어제와의 이별이 그렇게 큰일이 아니듯, 내일이 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면 어딘 가엔 닿겠지, 하고 마음을 편히 두는 거다. 물속에서도 가라앉지 않으려면 온몸에 힘을 빼야 한다고 한다. 마음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고 편안히 두면 어둠에 가라앉지 않고 서서히 떠올라 뚜렷해질지도 모른다.


  카페인 때문에 두근대던 심장 박동도 점점 느슨해진다. 떠나보낸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도 조금씩 옅어져 간다. 어딘가에서 잘 웃으며 지내기를. 가끔은 서로를 추억하며 그리워하기를. 지나간 것이 지금의 행복을 침범하지 않기를. 멀어져 간 것을, 내가 밀어낸 것이 아니기를 바라본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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