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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우맘 Jun 01. 2024

겨울에는 강릉에서 영화 한 편 찍으세요.

여행에서 날씨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비가 안 오고 돌아다니기에 적절한 온도면 어딜 누구와 가더라도 집 밖에 나온 그것 자체가 힐링일 것이다. 계절 또한 여행에 목적지를 택하는데 방향의 키를 잡는 중요한 요소이다. 봄이 왔으니 꽃구경하러 여름이니까 해수욕장 가야 하고, 가을이면 당연히 남들이 하는 단풍 구경하러 명산에 가야 하며 마지막으로 겨울이 오면... 강릉에 가야 한다.


몹시 추웠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둘째 날 레일바이크를 탔는데 강릉의 차디찬 바닷바람으로 내 뺨과 귀를 연신 얻어맞았고, 커피를 마시겠다고 줄을 1시간이나 서서 기다리는 내내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가서 쌀 것 같은 사람처럼 몸을 한껏 움츠리고 총총거리며 음료가 나오자마자 뜨거운 줄도 모르고 거의 단번에 들이켰었던 그 겨울, 나와 딸은 바다에 있었다.     


5번째 딸과의 여행을 강릉으로 정한 이유는 커피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여름 바다보다 겨울 바다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우연히 숙박 예약 사이트에서 하필 강릉 그곳에 정말 예쁜 펜션을 발견했고 내 생일에는 꼭 그 널따란 침대에 누워 여왕처럼 자고 싶은 나를 위해서 내 생일 2021년 11월 30일에 우린 그렇게 강릉에 갔다.     

카페거리까지 가는 길에는 소나무가 빼곡했다. 곧게 자란 나무도 있고 옆으로 누울 듯하게 서있는 소나무들 사이사이로 저쪽 회색 바다가 보일락 말락 했다.

강릉 온 이유 중 한 가지였던 그 카페는 아껴두고 다른 곳을 검색을 해보니 안목해변 카페거리가 굉장히 유명했다. 강릉역에서 버스를 타고 안목해변까지 갔다. 버스에서 내려 카페거리까지 걷고 걸어가는 길.  어깨에는 배낭, 비가 부슬부슬 왔기에 한 손에는 우산, 한속에는 빵을 들고 우리는 힘겹게 걸어갔다. 비까지 와서 우리는 시작부터 다리가 무거워졌다. 조금만 몸을 돌려 걸어가면 바로 해변이 나올 거리였지만 연우와 나는 소나무길을 걷기로 했다. 빼곡하진 않았지만, 소나무가 부슬비를 살짝 가려주었고 바닥에 떨어진 솔잎이 폭신하게 쿠션을 깔아줘서 우리의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은 가볍게 받쳐주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어가니 드디어 카페거리가 나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어디든 들어가자고 딸이 나를 계속 보챘다. 후기를 검색해 봐도 여기도 좋다, 저기도 좋다, 에라 모르겠다, 그 많은 곳을 내버려 두고 집 근처에서도 갈 수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바보니? 핑계를 대자면 스타벅스 건물 위치가 바다를 보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 1층에서 주스와 커피를 주문하고 들고서 2층으로 올라가니 만석이었다. 어떻게든 멋진 바다뷰가 내 바로 앞에 있어야 만족하고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차 공격을 위해 엉덩이를 반 공중에 들고 스쿼트 자세로 엉거주춤하게 마시고 있었다. 드디어 창가에 자리가 났다. “딸! 빨리 가서 자리 찜해!” 눈치를 살피며 딸이 가서 세이프하려는 순간 다른 커플이 앉아버렸다.

“아 엄마 포기해. 그냥 마셔.”

그래도 바다가 보이니 다행이라면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한쪽 다리 꼬고 앉아서 바다를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 바다는 보지 않으면서 제일 좋은 명당에 앉아놓고 큰소리로 수다 중인 사람들,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면서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는 남자, 저마다 하는 행동은 달랐지만 분명 바다를 좋아하고, 커피를 사랑하며 이 겨울의 강릉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일 것이다.


다 마셨으니 출발해 볼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우리는 오죽헌으로 향했다.

비는 어느새 그치고 파란 하늘 아래 신사임당이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이곳저곳에 명심해야 할 좋은 글들이 쓰여 있었다.

율곡 이이 <격몽요결>의 한 구절이 마음에 들어 딸보고 같이 읽어보자고 했다.

“연우야 봐봐, 친구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고 하네. 또 공부하지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나와 있지? 열심히 공부해.”

딸이 대답하길, “엄마 우리 언제 펜션 가?” 이런 엉뚱깽뚱을 봤나. 그래 여기까지 와서 무슨 공부 얘기야, 좋아. 빨리 가보자!

펜션은 2층으로 되어있고 제법 깊은 실내 수영장과 스파가 있어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연우는 구명조끼를 입고 다리가 풀릴 때까지 수영을, 나는 와인 한잔 마시지도 않았지만, 마음의 무거운 생각이 다 풀어져 녹아 없어지고, 피로는 이미 이 펜션에 들어온 순간 없어졌겠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한동안 누워 있었다.       


이튿날은 경포대의 바람을 맞으며 본격적으로 커피 사냥에 나섰다. 어제가 하필 쉬는 날이어서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침 일찍 갔는데도 줄이 정말 길었다. 고민을 아주 잠시 했지만 내 생일인데 아무렴 기다려야 했다. 평생에 맛집이라고 해서 줄 선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시간가량을 기다려 드디어 손에 쥔 흑임자라떼! 곱디고운 그 색깔! 연우는 이 광경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냥 허공만 바라보고 앉아서 엄마가 커피를 마시고 감탄을 하든 말든 무념무상이었다. 색깔이 꼭 진흙탕물 색깔이었는데 진득한 한 모금을 입에 머금자 묵직한 커피 향과 흑임자의 꼬순내가 조화롭게 섞여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지 않고 그냥 입에 머금고 싶었다. 한 모금 천천히 넘기자 내 식도는 빨리 그다음 모금 넘기라며 쭉쭉 빨아 당겼다. 아깝지만 순식간에 커피 한 잔을 홀딱 해버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1시간, 커피 마시는 데는 1분. 꼭 그래야만 했는가, 지금 질문해도 1시간은 기다릴 만한 라떼였다. 그렇지만 1시간 5분은 못 기다리겠다. 그만큼 춥고 시멘트 바닥 위 발이 시렸고 딸은 내내 줄이 안 줄어든다고 쭈그려 앉아 개미를 잡았다가, 우리 앞에 사람이 도대체 몇 명 있나 하나, 둘, 서른, 마흔 세어도 보고 좀처럼 우리 순서가 오지 않는 줄에 자기도 커피를 맛봐야겠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반의반 모금을 연우에게 맛 보여줬는데 태어나서 처음 맛본 커피가 흑임자 라떼라니! 어른들의 커피가 이런 맛이라면 자신도 평생 커피를 마시겠다며 그제야 왜 여기 줄이 긴지 이해가 간다고 연신 엄지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은 당일 아침까지도 하슬라아트월드냐 정동진 레일바이크냐 둘을 놓고 고민했었다. 초2를 데리고 아트를 논하기에는 아직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레일바이크로 움직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아하게 작품감상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노선을 바꿔서 걱정이 물밀 듯 밀려왔다. 곧 그 걱정들은 정동진의 파도에 산산이 부서졌다. 이제까지 갔던 여수바다, 경주바다, 남해바다에게는 미안하지만 감히 가짜라고 말해야겠다.

정동진의 바다는 왕이었다. 그날따라 바람이 매우 거셌고, 멀리에서도 파도는 소리부터가 압도적이었다. 그냥 눈감고 들으면 북한 탱크 수십 대가 밀려오는 듯 웅장했다.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는 거센 물결, 1번 파도 막 내달려 오면 그 뒤 2번 주자가 기다리지 못하고 따라잡으려 더 추격전을 벌이듯 내달려 오다 서로 부딪혀 부서져서 새하얗게 거품을 뿜었다.

양 끝이 가늠도 안 갈 정도로 정말 커 보였던 바다, 그 위에는 정말 잉크를 풀어놓은 듯 맑게 쫙 펼쳐진 하늘, 뭐 하나 오점이 없었다.

레일바이크는 운전하러 가기 전에 안내원이 작동법을 알려주는데 정말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솔직히 귀에 안 들어왔다. 내가 왜 뚜벅이 여행자인데…. 운전면허증이 없어서이고 나 같은 무면허가 바퀴 달린 것을 운전한다니 말이 되지 않았지만 우선 운전대를 잡았다. 스틱 하나를 앞뒤로 움직여 속도를 조절하는 거였지만 거의 KTX 속도감에 나는 아기 날 때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구간도 굉장히 길었다. 거기에 바로 옆에서는 파도 소리가 내 귀를 계속 때리고 있었고, 그런 호들갑이 아닌 호들갑에 연우가 웃겨 죽겠다며 진정하라고 나를 달랬다. 페달 밟으랴 소리 지르랴 정신없었지만 반환점을 돌은 후에는 어느새 운전에 여유가 생겼다. 어라? 나 운전 잘하네! 레일 바로 옆에 거친 파도도 잠시 구경할 짬이 그 짧은 시간에 생겨서 질리도록 바다를 바라봤다. 바퀴가 레일 위를 지나가는 소리, 파도 소리 때문에 귀가 따갑고 먹먹하기는 했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다. 딸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준다고 체험한 건데 정작 내가 제일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 다 풀어놓고 제대로 놀아본 시간이었다. 놀라운 동해바다였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영화가 끝난 듯한 강릉 여행이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영화도 보통의 그렇고 그런 영화가 아닌 대서사극이 끝나 여운이 크게 남는 작품이었다. 날씨가 처음엔 NG를 냈지만 이내 제자리를 잡았고, 그 겨울 계절이 총감독으로 잘 이끌어간 감동의 한편! 좋은 영화는 또 봐야 하는 법이다.

강릉 바다여! 기다려라. 그 자리 그대로, 그 차가움 꼭 간직하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또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아니 딸과 같이 커피 2잔을 들고 너를 또 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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