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감정 그대로 , 반사!
반면교사(反面敎師)
'도대체 이거 왜 쓴 거야?'
그의 비평은 지적으로, 지적은 비난으로
비난은 개인의 인격과
내가 속한 단체의 모욕으로 이어졌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어떤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의 무소불위 언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럴 때는 마스크가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는 지쳤는지 손에 들었던 서류를
책상에 툭, 아니 확 던졌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의 행동을 하나 빠짐없이
마치 감지 카메라가 그의 동선을 따라가 듯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봤다.
내 눈을 피한 건 그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흠칫' 했다.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과 당황한 몸짓에
나는 너스레를 피웠다.
'지적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에 머리라도 박을까요?'
집으로 돌아와 전화기 끄고 침대 머리에 머리를 박았다.
'내 글이 그렇게 욕먹을 일인가?'
내가 왜 욕받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요즘 시대에 전혀 먹히지 않을
나이와 성과 학벌과 소속을
싸잡아 몰아세우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억울한 상황에서
배우고 쌓아뒀던 논리와 이성은 어디다 말아먹고
시니컬한 썩소로 분위기를 무마하려 들다니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비평과 비난에 익숙하지가 않아서가 아니다.
내가 욕먹는 건 괜찮은데
나의 출신, 나의 소속, 나의 관계망이
나로 인해서 욕먹는 게 매우 불편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금은 진중하게
항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감정에 휘둘려 어버버 거리는 대면보다는
생각하고 고치고 말실수하지 않는
비대면이 좋다고 생각했다.
카톡으로 하든, 메일로 하든, DM으로 하든
얼굴과 목소리가 배제된 오직 글로만.
그렇게 하루가 가고
마치 파이널 오디션을 앞둔 배우처럼
준비된 글을 카톡으로 보내려고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읽을 때였다.
그 만남의 연결고리인 중간자가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어졌다.
한숨 돌렸다.
전화를 극도로 꺼려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문자가 왔다.
'작가님, 통화 가능하세요? 제가 전화드려도 될까요?'
바로 울리는 전화. 다시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전화는 다시 끊어졌다. 그리고 장문의 문자가 왔다.
'작가님 (...) 저는 작가님 응원합니다.
(...) 저는 작가님 대본 참 맘에 들었는데
(....) 주인공 매력적이에요, 엔딩도 참 좋았고요 (....)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화를 낸 건 사실,
이건 전화로 말씀드려야 하는데 (...)'
나를 후킹 하는 솜씨에서 중간자의 노련미가 보였다.
그에게 바로 전화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모든 면을 뒤집고 뒤집어 봐도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게 결론이다.
그렇게 나이와 지위로
갑과 을의 수직적 관계를 들먹거리며
나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더니
겨우 그것 때문에....
나는 '겨우'라는 부사를 써가며
나의 억울함을 비아냥으로 무마했다.
그가 당한 억울함을 이해할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맘이 한결 가벼워져 글이 잘 풀렸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른하게 배부른 기분이 들자
그의 성미 마른 모습이 애처롭게 여겨졌다.
그리고 미팅 초반에 그의 지적질을
야무지게 적어놓았던 노트를 펼쳤다.
또박또박 거리던 나의 글씨는 한 장 두장 넘어가면서
내 마음만큼 휘청거렸고
한 부분은 수성펜으로 하도 꾹꾹 눌러 구멍이 나있었다
해가 졌다 떴다 여러 하루가 지났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나를 근거 없이 만만하게 봤지만
나는 그를 근거 있게 만만하게 볼 수 있었다.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나를 위로한다는 순한 메시지에
매운맛의 제보를 곁들였다.
위로와 격려로 포장된 뒷담화용 '카더라'를 알려왔다.
그들이 보낸 메시지의 사실과 진실 여부를 떠나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그들 역시 나만큼 당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직속 부하의 관계라 항의하기 어려운
사내 정치적 입장에 이였지만
나는 제3자, 외부 소속이었기에 그들은 나에게 화력을 모아주며
내가 그와 일대일 끝장 토론이라도 벌려주기를 원하는 듯했다.
순간 우쭐하기도 했다. '글발로 한번 덤벼봐?'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슨 의미란 말인가...
또아리를 틀었던 나는 스르르 어깨에 힘이 빠졌다.
사내 정치에 외부인사인 내가굳이 말려들 필요는 없었다.
부당함과 억울함이 적절히 치유되지 않으면
그 감정은 열등감 또는 피해의식으로 자라날 수도 있다.
'~ 수도 있다'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가능성이고 확률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부당함을 합리화하며
자신이 당했던 만큼 혹은 더해서 돌려주었다.
학력, 성, 소속, 단체, 나이, 외모까지
그렇게 비교우위로 따지자면
나보다 우위에 있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
그가 단순히 갑의 위치에 있다는 거,
그리고 내가 소속한 단체에
그가 한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거,
그것이 나에 대한 인격 모욕으로 이어진 근거였다.
그의 태도는 시대 보정이 시급했다.
새로 속속히 등장하는 신조어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성 감수성이 무지하게 낮은 인간으로
80년대의 군대에서나 보일까 말까 한
수직적 관계를 몹시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었다.
지질하고 야비해 보였다. 그렇게 했어야 했나...
부정적 감정을 부정적으로 자라나게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도 나 자신이다.
이 감정의 전환은 제법 힘든 일이다.
그가 보낸 부정의 감정은 반사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해석만 긍정적으로 하면 된다.
말이 쉽지, 이 과정은 반대로 일어난다.
감정은 스펀지처럼 흡수되어 버리고
지적받은 부분은 성장시킬 비료가 되지 못하고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로 분류되고 만다.
그리고 흡수된 감정의 색을 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성격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바로 그 사람처럼.
그에게 보내려 했던 밤새 칼 갈았던 항의 메세지는 삭제했다.
대신 나를 응원해준 모두에게 일일이 감사의 답변을 보냈다.
괜찮다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당신들의 배경 설명 덕에 웃을 수 있다고.
그래, 그들 덕분에 감정은 무시하고 내용은 꿀꺽한다.
소화시키는 건 이제 나의 몫이다.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서 수십 년을 지키며
잔뼈가 굵은 자다.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다.
인성과 인격까지 비하하기 싫지만 흠..
그저 아직 자라나지 못한 상처투성이의 어린아이가
가끔씩 툭툭 튀어나올 뿐이라고 순화해서 말하면 그만이다.
작가가 별건가. 이렇게 말을 곱게 돌려 까는 것도
삶의 다양한 모습을 정화해서 글로 쓸 수 있다면
그게 글을 다루는 사람인 거지...
이제 됐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 안의 어린아이조차 그의 모습이 우습게 여겨졌다.
그가 지적했던 부분들은
내가 무럭무럭 자라는 성장의 비료가 될 거다.
두고 봐라, 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