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써 외면해 왔던 진짜 감정을 확인해버렸다. 극에 달한 아이의 짜증에 너덜거리는 멘탈로 남편과 통화를 하다가 내 상태를 객관화하게 된 것이다. 저녁 준비를 하러 아이를 등지고 싱크대에 서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충격이었다. 아무리 딸이 하루 종일 날 힘들게 하기로 서니. 엄마라는 게 이렇게까지. 끔찍한 기분이었다. 내가 몹시도 낯설었다. 복잡한 감정에, 절망에 빠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덜컥 겁도 났다. 한참을 울고 내 밑바닥을 확인하고 나자, 오히려 평소처럼 막무가내인 딸을 바라보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아닌가. 포기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아이가 뭐라 하든, 나는 동요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아이와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었다. 이렇게 내 감정과 나를 떼어 놓고 바라보니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아이가 딱해 보인다. 나는 어쩌다 이런 부적절한 엄마가 되었나.
6년 전 아이를 원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찾아와 준 아이,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를 고대하고, 갓 나온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고, 어떻게 잠 습관을 들일지 눈병 나게 고민하고, 좋은 엄마가 되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이 아이 낳은 일이라는 선배 엄마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돌이 되기 전 아이와 다른 방에서 자던 시절, 잠이 깬 걸 확인하고 그 방문을 열러 가는 몇 걸음 사이, 가슴이 뛸 정도로 설렜다. 다들 첫째는 귀여운 거 모르고 키운다는데, 나는 어쩜 이리도 귀여울 수 있냐고 매일 감탄했다. 육아 휴직 기간 2년 동안 힘들 때도 많았지만 육아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랬었는데, 요즘은 모르겠다. 눈뜨고 잠들기 전까지 내내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짜증을 나는 아이에게 나도 똑같이 짜증으로 대했다. 나와 아이의 대화를 듣고 옆에서 남편이 왜 그렇게 싸우냐고 할 정도였다. 아이와 긴 시간을 둘이서 보내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내 감정이 바닥을 치기까지, 그에 앞서 내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까지 많은 시간과 감정이 쌓이고 쌓였다. 아이에 대해 이전에 남긴 글을 찾아보다가, 딸이 5세가 된 봄에 처음으로 아이의 귀여움이 아닌 반성의 글을 쓴 걸 다시 읽게 되었다. 요가를 하러 가려는데 못 가게 하고 뭐든지 “엄마랑 할 거야.”라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나도 버럭 소리를 지르게 된다고 고민을 했더랬다. 처음으로 변한 나에게 놀랐을 때였나 보다. 하지만 아이의 경이로운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남겨둔 다른 글들을 읽다 보니, 아이는 한결같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남의 도움 없이 주말에만 남편이 거들고 유치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와의 시간이 절대적인 나란 존재는 늘 막강했다.
단지, 내가 변한 것이다. 이쯤 되면 아이가 컸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원래 있었지만 아이에게 집중하느라 탐하지 않았던 것들)이 차차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까지 먹이고 퇴근한 남편이 집에 와 요가원에 가려하면 울고 매달리는 아이 때문에 포기한 게, 5세부터 최근까지 반복되고 있다. 책을 읽거나 뭘 보려고 하면 아이가 자기 말에 집중 안 한다고 책을 던져버리거나 끈다. 그때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참 귀찮았다. 아토피 때문에 짜증이 늘었다는 건 사실일지 몰라도 본질은 다른 문제다. 사실 나는 아이를 컨트롤하는 것에 서툴렀고 같이 놀아주는 것을 힘들어했다. 아이가 커갈수록 내 시간이 많아질 것을 기대했다. 아이는 자기와 충분히 놀아주지 않는 엄마가 못마땅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쓸 시간이 늘 고팠고, 그때마다 아이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런 감정이 점차 숨기지 못하고 요즘 들어 과격하게 표출되었고, 아이도 느꼈을 거다.
내 감정이 바닥을 치고 난 다음날, 휴일이었지만 남편이 출근해서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날 오전에 내가 차를 마시는 동안 아이는 제법 혼자 잘 놀았다. 한동안 각자의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가 비즈를 찾아달라고 나를 불렀다. 나는 의식적으로 아이가 하자는 ‘아쿠아 비즈’ 만들기를 함께 했다. 색깔 별로 구슬을 찾아서 아이에게 주면 나비 모양, 꽃 모양으로 만들었다.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이를 함께 했다. 그동안 우리는 짜증을 한 번도 내지 않았다. 같이 카페에 가서 음료를 마시고 사람들과 퀴즈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온전히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로 충만했던 때로. 어쩌면 엄마가 전날 자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예민한 아이가 눈치챈지도 모르겠다. 자기 전 몸 씻는 걸 너무 싫어해 한 시간 가까이 실랑이 끝에, 좋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씻곤 하던 아이가 그날 저녁엔 스스로 씻었다. 자기 전까지 둘 다 큰소리 낼 일이 없었다.
간사하고 치졸한 엄마 눈에, 다시 아이가 귀여워졌다.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내 마음이 금방 회복할 수 있음에 얼마나 안도하는지 모른다. 아이가 돌이 지나고 기념으로 ‘세 사람 책’이라는 사진집을 만들며 아이에게 편지를 쓴 것을 다시 꺼내봤다. 아이와 사랑에 단단히 빠졌던 초보 엄마가 쓴 편지의 일부분이다
‘나중에 훌쩍 자란 너를 보며 우리만의 징한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그리울까. 그 생각만 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다시 깨닫고는 한 번씩 힘들다가도 곧 마음에 위안이 되더라. 인생에 다시없을, 너랑 늘 붙어 다닐 수 있는 지금의 시간 동안 후회 없이 행복하게 보내야지’
그때도 알았고, 지금도 안다. 자주 어리석음에 빠지는 부족한 엄마는 잠깐 멈춰서 다시 현명해질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막 일춘기를 보낸 딸아이와의 관계를 정비하고 다시 가야 할 때다. 아이의 사춘기까지 가지 않아도, 많아봤자 5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나.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인생은 길고 거기 비하면 유년기는 찰나와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