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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광섭 Nov 15. 2018

1년 하고도 3개월

근데 여행은 3개월. 휴학 하고 돈 모아서 세계일주 #1

휴학 하고 돈 모아서 세계일주 #1

<Prologue : D-12개월>




Prologue
저는 세계일주를 하러 갑니다.


   저는 세계일주를 하러 갑니다. 몇 년에 걸쳐 세계를 돌아보는 것도, 몇천만 원씩 들여서 여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3개월, 1,200만 원만 가지고 떠납니다. 열심히 살다가 불현듯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여행도 아닙니다. 저는 2018년의 해가 떠오르는 그 날부터 이 여정을 계획했습니다.

   지금부터 저의 1년을 담을 이야기를 할거에요. 세계 일주를 계획한 그 날부터, 여행을 모두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심심할 때마다 읽어보세요. 여행에 관한 정보도 있으니까.



D - 12개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리없죠

   지어진지 8년밖에 안 된 신식 막사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니, 정확히는 신식 막사의 샤워실에서 시작된다고 해야겠네요.
   샤워실은 2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입니다. 바닥엔 짙은 회색 타일을 깔았고 옆 벽은 모두 새하얀 타일로 도배 되어 있습니다. 대중 목욕탕에서 흔히 볼법한 거울이 붙어었죠.

   저는 늘 그랬듯 일과가 끝나고 샤워실에 들어갔습니다. 동기가 먼저 벌거벗은 몸을 씻고 있었습니다. 맞은편 자리로 가서 샤워 바구니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수도꼭지를 중간보다 조금 왼쪽으로, 적당히 따뜻한 물이 나오게 틀었습니다. 동기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전역하고 뭐할 거냐, 복학?"


" 음 ... 세계일주. 1년 휴학하고 돈 모아서 그 돈으로 한 3개월 정도 다녀올거야. 그리고 그냥 여행만 하면 또 아쉬우니까 뭐 글이라도 하나 쓰려고. 장난 없지? 같이 갈래?"


"아니. 난 빨리 복학할거야.얼른 졸업하고 돈 벌어야지. 그나저나 여행 재밌겠다....근데 가능할까?”

   전역을 한달 앞두었던 저희는 수증기가 그득한 샤워실에서 이 행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찬 공기와 따뜻한 물줄기가 섞여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세계 일주"라는 말. 저는 나름 진지했지만, 동기에게는 지나가는 우스갯소리처럼 들렸을 겁니다. 하지만 아니 땐 굴 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들려도 말을 한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토록 꿈 꿔왔던 '말년병장'이라는 건 직접 되어보니 정말 심심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업무는 손에 익다 못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죠. 훈련은 전역을 앞두고 있으니 열외였고, 생활관에서 해야 하는 자잘한 일들도 제 손을 떠났습니다. 무료함이 세상을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왜 신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휴대폰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싸지방에서 종일 컴퓨터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TV는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고, 운동도 썩 재미있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은 조금 달랐습니다. 책에 담긴 내용이 재미있기도 했고, 후임들에게 "야 나는 책도 읽는다. 너희도 좀 인문학적 교양을 쌓아라. 맨날 트와이스 보면서 춤만 추지 말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독서는 무료함으로 잠식된 하늘 틈으로 새어 나온 한 줄기 빛 같았습니다.
   일과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읽을만한 책을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워낙 남이 사는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서, 에세이 위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남는 게 시간이기에 생각보다 많은 에세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딱 전역을 37일 남은 시점, 저녁을 먹고 읽은 에세이 하나가 제게 굴뚝을 때어줬습니다.
온전하게 남는 침묵 같은 여운을 지닌 책이었죠.



숨결이 바람 될 때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인 '폴 칼라니티'는 신경외과 의사입니다. 그는 레지던트라는 고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저명한 의사의 빛을 볼 무렵 폐암에 걸렸습니다. 자신들이 돌본 환자들이 누워있던 침대에 되레 본인이 눕게 되었죠.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자라온 과정과 자신의 신념, 죽음에 대한 고찰을 문장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그는 글을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죽고 난 후 부인은 유고에 마지막 장을 더해 책을 출판했습니다.
   책에 담긴 문장 속에서, 그의 삶의 목표는 한결 같아 보였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의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의학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 생을 고스란히 바쳐 해답을 얻고자 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도 그는 처절하지만 덤덤한 어조로 문장을 이어갔습니다. 책을 덮은 후, 저는 그런 고고함을 앞에 두고 한동안 여운에 잠겼습니다.

   후회 없는 죽음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왜인지 그런 죽음을 맞이했을 것 같습니다. 한평생을 바친 의문의 매듭은, 죽음으로써 풀어낼 수 있을테니까요. 그는 어쩌면 그 순간만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깝지만, 부러웠습니다.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둔다면 어떨까요?


   폴 칼라니티 처럼 고고함 속에 눈을 감을 수 있을까요? 그는 마치 삶의 목표와 마주앉은 것 처럼, 죽음을 차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차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지.

   결국 정말 뻔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가 하고싶은 걸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확고한 꿈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20살이 되어 달콤한 대학 생활을 맛보면서 꿈은 한쪽 서랍에 박혀 먼지가 쌓였습니다. 수원에 올라와 자취생활을 시작한 후 "별이 빛나는 밤에"는 자주 놀러 갔는데, 별이 빛나는 밤은 본 기억이 없더라고요.

   저녁 점호가 끝나고, 철제 침대 위에 모포를 덮고 누웠습니다. 서랍 한 켠에 있는 그 꿈을 꺼내 봤습니다. 두툼히 쌓인 먼지부터 닦아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아마 어렸을적 별을 보며 느꼈던 그런 콩닥함을 찾아주면 될 것 같았습니다. 보은군 속리산 시골 자락에서 봤던 그 별들을 다시 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기왕 보는 거, 내가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모든 별들을 경험하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먼지가 짙게 쌓인 꿈을 반짝반짝 광도 내고, 니스도 다시 칠해주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충북 보은군 원정리 느티나무에서 바라본 별. 제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려면 온 지구를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24년을 살았던 커다란 북쪽 대륙 말고, 반대편 남쪽 땅도 밟아봐야 했습니다. 먼지 한 번 닦기 위해 세계를 돌아봐야 했지만, 어쩌면 그만큼 먼지가 두툼히 쌓여 있던 건가 싶었습니다. 세계 일주라는 게 말이 쉽지 전혀 가늠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막연함은 행동으로 구체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도서관보단 *싸지방에 갈 일이 잦아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입니다.





*싸지방 : 사이버지식정보방의 준말. 부대 내에서 용사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컴퓨터가 있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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