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 중고로 샀습니다. 휴학하고 돈 모아서 세계일주 #2
휴학하고 돈 모아서 세계일주 #3
18년 1월 3일 오전 8시 50분
샤워실에서의 대화가 끝난 지 한 달이 지났어요. 완연한 겨울이 찾아오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ㄷ자 모양의 신식 막사에 짙은 폭설이 내렸어요. 벽돌의 붉은빛 사이사이, 하얀 눈꽃이 스며들었죠.
그리고 평화로운 막사를 뒤덮은 폭설이 그칠 무렵,
저는 전역을 했습니다.
아름다운 벚꽃은 없었지만, 내렸던 눈이 나뭇가지 위에 쌓여 꽃을 만들어줬어요. 눈꽃을 품은 막사를 빠져나와 보은행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2번 재생목록을 눌렀더니, Maroon 5의 "Lost Stars"가 귓가에 들렸어요. 버스 안에서 본 먼 산의 풍경은 그 어느 날보다 짙은 하얀색이었죠. 전국에 걸쳐 내린 폭설에, 산 하나하나 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어요.
그렇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산을 지나치고 버스에서 내렸더니, 읍에서 끝자락에 위치한 저희 마을도 폭설 때문에 눈이 가득 쌓여있더라고요. 물광을 낸 군화로 눈을 밟아가며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전역의 새하얀 여운도 잠시, 끝은 또 다른 시작이잖아요. 세계 일주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봐야 했어요. 기간은 얼마나 소요되며, 돈은 얼마나 드는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찾아봐야 했죠. 하지만 정보가 없었어요.
여행은 기껏해야 동남아 몇 군데 다녀온 게 다인데, 제가 세계 일주에 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군복을 갈아입고, 컴퓨터를 켰습니다. 네이버를 열고, ‘세계 일주'라고 검색했어요. 세계 여행자의 블로그와 포스팅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꼼꼼히 읽어봤죠. 읽어 볼 만한 포스팅이 꽤 많았어요.
이렇게 하나하나 정보를 모으면 조금씩 가닥이 잡힐 테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검색창에 내용을 지우고 다시 쳤습니다.
“세계 일주 관련 책”이라고요.
세계 일주 바이블
세계 일주보다 재미있는 세계 문화유산
80일간의 세계 일주
세계 일주 바이블
메밀꽃 부부 세계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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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는데, 눈에 들어오는 게 “세계 일주 바이블"이었습니다. 책 이름 한번 잘 지은 것 같았어요. 바이블. 성경. 음 뭐랄까 약간 세계 일주의 정석 같은 느낌? 한 줄 소개도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세계 일주 바이블 / 장장 13년간 축척한 세계 일주 정보를 담은 지침서이다 / 19,800원"
좋아요. 결정했습니다. 모든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이니까. 한 번만 정독해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던 세계 일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바로 링크를 열고, 구매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멈칫했어요.
이제부턴 돈을 아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여행에 얼마가 필요할지 모르고, 언제 출발할지도 모르잖아요. 네이버를 끄고 알라딘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갔습니다. 알라딘은 중고서적들을 매입해서 판매하는 곳인데, 정가보다 크게는 50% 정도 할인해서 살 수 있죠. 그곳에서 다시 ‘세계 일주 바이블'을 검색했고, 운이 좋게도 책이 9,900원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책이 온 당일, 방에 틀어박혀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정독했어요.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잠도 안 자고 읽었죠. 비로소 대략적인 갈피가 잡혔어요. 여러 세계 일주자들의 이야기를 읽어 본 결과, 다들 3달 이상은 여행하더라고요. 비용은 항공권, 숙박비 등을 고려해봤을 때 최소 1,200만 원은 필요해 보였어요.
그러니까 돈을 모아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면,
적어도 기간은 90일. 예산은 1,200만 원정도.
제가 군 생활 2년 동안 뼈 빠지게 모은 돈이 200만 원인데, 이제부터 1,200만 원을 모아야 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모을 수 있는 돈이 도저히 아닌 것 같더라고요. 최저시급을 고려해보면, 적어도 하루에 9시간은 일해야 할 텐데. 휴학이 필요한 것 같았어요.
집에서 나름 귀하게 큰 막둥이라, 부모님께서 휴학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았어요.
(사실 세계여행 자체도 허락해 주실지 미지수였죠)
행여나 휴학을 허락해준다고 해도, 그 기간은 아마 1년이 최대일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돈을 모아 세계 일주를 하고 싶다면,
적어도 기간은 90일.
예산은 1,200만 원 정도이고,
그 돈을 1년 안에 모아야 한다.
대충 갈피가 잡혔으니, 이제 첫걸음을 떼야했어요.
부모님에게 저의 휴학과 여행을 허락 맡는 것.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운을 띄워 봤습니다.
"엄마, 나 휴학하려고. 한.. 1년?
휴학하고 세ㄱ.."
"안돼.
얼른 취직해서 직장 잡아야지. 누나들 이제 다 결혼한 거 안 보여? 너만 남았어."
"응."
다들 그런 느낌 있잖아요. 더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잠시 마음을 고이 접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뭔가 뚜렷한 목적과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나는 이렇게 알차게 휴학 기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휴학을 통해 나는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1년 치 계획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어요.
휴학 계획서
컴퓨터를 켜고, 워드프로세서를 열어 페이지 맨 위에 '휴학 계획서'라고 썼습니다.
제가 깔끔한 걸 좋아해서, 나름 정갈하게 첫 페이지를 꾸몄어요. 그러고는 막연하게 떠다니는 생각들을 하나씩 글로써 정리해 나갔어요.
큰 주제별로 목차를 나누고, 나눈 주제별로 자세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휴학 기간 동안 돈을 모으면서 다른 걸 할 수 있는지(자격증 / 영어공부 등등). 어디서 살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할지. 항공권은 언제 사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쓰려했지만 확신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학사 졸업장도 없는 상태로 한 달에 120만 원씩 저축하는 게 가능한지.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적어도 2월부터는 일해야 하는데, 한 달 만에 그런 일자리가 구해질지.
잘 모르면 부딪혀보는 것도 방법이라 했잖아요. 막연하지만, 일단 가능할 것이라 믿고 쭉 써 내려갔어요. 초안을 작성하고, 수정을 거듭했어요.
그렇게 계획서의 마지막 검토를 끝낸 날,
왠지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 그날 저는 아침부터 설거지도 하고, 장작도 패고(집에 난로가 있습니다), 빨래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저녁 시간.
부모님께 계획서를 보여드렸어요.
상경
일주일 뒤, 저는 들뜬 마음을 이끌고 옥천역으로 향했어요. 아득히 뻗어있는 기차 레일 위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습니다. 저 멀리서 무궁화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다가왔어요.
제 가방 안에는 휴학 계획서 한 부, 휴대폰, 노트북이 전부였죠. 코레일 앱을 켜고 발행된 기차 탑승권을 한 번 더 봤습니다.
6호 차. 고개를 들어 6번 홈을 찾았어요.
아. 왜 갑자기 서울행 기차를 탔느냐면요. 일자리를 구해야 했거든요. 집이 워낙 시골이라 아르바이트가 일절 없었기에, 수원이나 서울에서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습니다. 참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기 전까진 서울에 큰누나 집에서 얹혀살기로 했어요. 불편할 것 같았지만, 얼른 일자리를 구하고 자취방을 얻어서 나가면 되니까 괜찮았어요.
기차는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내더니, 이내 참았던 숨을 내쉬며 멈춰 섰습니다.
제 바로 앞 발치에서 열리는 문에 “6번”이 쓰여 있는지 확인하고, 기차에 올랐습니다.
이제 일자리만 구하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