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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a Jeon Oct 24. 2021

에필로그 : 세상의 Disgraceful Girls에게




에필로그 : 세상의 Disgraceful Girls에게


우연히 예전에 쓰던 이메일함을 보았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이메일에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포기를 못해 언론고시를 준비하던 내 처절한 분투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최종 면접 준비를 위해 돈까지 내고 만난 강사에게 내 스펙을 재단하는 피드백이 보인다.  첨삭을 받은 논술과 에세이를 쓰던 흔적들도 보였다. 어쩌면 나를 함부로 대하고 평가하는 세계에서 버둥거리며 살아갔었지.


뻔뻔하고 되발라질 줄 몰랐다.  세상이 그려놓은 선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지하며 살아왔다. 타인이 인정해주고 평판이 좋다고 여겨지는 일만 하려고 했다.  나는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대만으로 갔다.   감히 뻔뻔하게 새로운 세상을 맛보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대만은 한국보다 타인에게 너그럽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졌다.  게다가 외국인인 나는 대만 사람들의 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평가에서도 자유로웠다.  현지인들이 서로에게는 '왜 결혼을 안 하니', '직장 연봉은 어떠하니'라고 물었다.  외국인이 나는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언제까지 대만에 머물 것인지만 물었다.  '나도 몰라'라고 가볍게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새로운 세계의 외부인으로 살아가며 거칠 것이 없었다. 대만에서 비로소 나를 지배했던 규칙들이 인수가 아닌 변수 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들로 인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열등감마저 없어지니 나는 긍정적이고 명료하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초조함이 사라지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변했다. 한국에서의 때를 이제야 벗고 있는 듯하다.


나는 평온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은은한 보조등을 켜고 숨을 고른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좋아하는 대만 노래를 튼다. 벽에 붙여놓은 가사를 따라 부르면서 춤을 춘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며 제멋대로 춤을 추는 것이 즐겁다.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도 건강해진다. 며칠 전에 웰컴 마트에서 사 온 100NT짜리 소고기를 꺼낸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니 살짝 얼어있다. 물에 씻어 살짝 녹인 후 상온에 놓는다.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고기가 말랑말랑 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팬을 뜨겁게 데운다. 대만에 가정식 가스레인지는 불이 강해 조심해야 한다. 강한 불과 약한 불 사이에 팬을 데우다가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고기를 올린다. 치익- 강하게 겉면을 태운다. 레어 스테이크가 완성된다. 



꽃시장에서 사 온 바질을 따서 고기 위에 올려 먹는다. 완벽한 첫 식사다. 조리를 하지 않은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지나가면 다시 강하게 조리된 화려한 음식들이 끌린다. 그때는 그런 음식을 먹으면서 즐기면 된다. 맛있는 맥주 한 잔은 덤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무릎 상태를 회복하고 다시 기분 좋게 뛰는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나아가는 것이다.


내가 평온 속에 찾은 다짐들이다.

책을 더 많이 읽으며, 우아하게 움직이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법을 익힐 것.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자는 습관을 만드는 것,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지 말고 비난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말 것.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아껴줄 것. 매일 아침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 내 삶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누군가의 생각이나 편견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것.  삶의 발란스를 여유롭게 즐길 것.


마치 나는 다시 태어난 것처럼 되바라지고 당당하게 다른 사람의 기준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온몸을 통과하여 만들어낸 변화는 내 정신에 매겨졌다.  세상의 Disgraceful Girls에게. 새로운 세계에서 자기의 알을 깨 보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자신에게 따뜻한 눈빛을 보내는 곳으로 발을 뻗어보자.  놀랍게도 더 행복하고 강한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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